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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ul Korea

독일TV ZDF 다큐멘터리가 인정한 유럽지배한 훈족은 한민족

by 두루물 2011. 5. 21.

 


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

유물·유적 통해 추적해본 한민족의 뿌리

 

독일TV ZDF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 ‘잃어버린 고리 찾기’ 은 375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아시아 유목민족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 즉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실제 신라 및 가야인과 훈족의 유물, 유적 등을 비교해보면 편두(扁頭, 일명 납작머리)와 금관 머리장식 등 여러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김진삼 회백이 동양적 외모를 살려 그린 아틸라 초상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점은 우리의 과거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 중 하나다. 통일에 외세를 개입시킨 나쁜 선례를 남긴 데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당나라에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좋아 통일이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아시아 동북부 일원에서 고구려가 막강한 중국에 맞서 수백 년간 영토를 확장하며 위세를 떨쳤기 때문일까. 한국 사람들은 멸망한 대국, 고구려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고구려는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음에도 한때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당시 고구려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모두 되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 이후, 세계 역사는 유럽 중심으로 흘러왔다.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 몇몇 아시아 민족이 유럽에 진출하긴 했지만, 로마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로마를 멸망시킨 세력은 다름아닌 아시아 민족인 훈족(Huns). 서기 375년, 기마 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를 공격했고,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다. 이에 서고트는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서 살게 된 지 100년 후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결국 게르만족의 수장(首長)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등 여러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유럽에는 새 국경이 그어졌다. 이때 성립된 국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



그런데 최근 서유럽에서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시키고 로마제국을 풍전등화의 운명속으로 몰아넣은 주인공인 훈족이 실은 한민족의 일파임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주장에 흥미를 갖는 사람도 많지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훈족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생소할 뿐더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서기 4∼5세기경 한반도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어떻게 유럽을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역사적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훈족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 민족을 통칭한다)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7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진출해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반점은 꼬리뼈 높이의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훈족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기마인물상 토기. 북방 유목민족의 특성을 지녔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扁頭, 납작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그런데 가야국이 창립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됐다. 또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진한(辰韓)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랫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대·소형의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동복은 정화 의식(Purification rite)에서 고기를 제물로 바칠 때 쓰는 동제 용기로 대형 화분처럼 생겼다.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동복은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국보 91호) 토기에도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발견된다. 게다가 이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모두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출(出)자형 장식)과 녹각형상(사슴뿔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 민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서쪽의 훈족, 동쪽의 한민족


그렇다면 고대 한민족의 원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흉노의 왕으로 ‘하늘의 아들’을 뜻함)인 질지(郅支)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강 중류에 당도한다. 이것이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BC 6년∼AD 57년)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아시아의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훈족의 유물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금관가야의 대표적 유물이 다량 출토된 김해 대성동 고분.

그러나 한나라는 화제(和帝, 89∼105) 원년인 89년에도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고 사분오열된 북흉노는 대부분 동호(東胡)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일부 북흉노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땅에 이르렀다. 이것이 흉노의 제3차 서천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한나라 왕조가 붕괴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304년 당시 산서의 태원에 자리잡고 있던 유연(劉淵, ?∼310)은 진(晉)나라 혜제에 의해 남흉노의 왕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유연은 과거 선조 중에 한나라의 공주가 있었음을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예라고 내세우며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그는 308년 태원에서 북한(北漢, 즉 前趙)을 세운다.
 
318년 석륵(石勒, 274∼333)은 전조를 폐하고 후조(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 국가를 세웠고, 349년 석민(石閔)이 후조의 정권을 잡았다. 석민은 흉노에게 원한이 많은 한인(漢人)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흉노 토벌에 나서도록 한 뒤 무려 20여 만명의 흉노가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흉노로서는 이것이 결정적 패배였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 생활을 하던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남은 흉노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흉노의 제4차 서천으로, 이들은 이미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흉노는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한편 한반도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가야와 신라 지방인데, 중국과의 전쟁 와중에 훈족의 지배집단 중 일부가 동천(東遷)하여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 훈족의 지배집단이란 유목민의 수령(首領)이 속한 부족을 말한다.

학자들은 흉노·동호·선비·오환 등 북방 기마 민족들의 흥망이 가야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늦어도 1∼3세기까지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 이후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었고, 변한은 3세기 이후 가야란 명칭을 갖게 된다. 이는 3세기말∼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됐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야란 나라가 신라나 백제와 달리 내부에 다양한 여러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가야의 건립시기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무려 5세기의 차이를 보이는 등 논란이 많다.

학자들은 경상도의 가야고분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금관가야는 흉노가 직접 한반도에 들어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볼 때 흉노 속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하여 가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결혼 조건으로 로마의 절반 요구


가장 넓은 대국을 건설한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칭기즈 칸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아틸라(Attila, 395∼453)를 들 수 있다.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보다 20년 늦은,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 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문주크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코스와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 공물을 주어 화친(和親)하면서 게르만족을 경계했다. 이에 따라 당시 외교 관례대로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오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434년 왕위 후임자였던 삼촌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새 왕으로서 자신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어기자 435년 동로마로 진격했다. 이에 동로마는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아틸라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어 아틸라는 서로마로부터 서고트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는다. 이로써 훈족은 로마제국을 제치고 사실상 유럽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는 훈족의 단일지도자가 됐다. 아틸라가 지배한 훈제국의 통치권은 남으로는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그리고 서로는 현재의 프랑스 땅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미쳤다. 치하의 종족만 해도 45개 종족에 달했다.

이때 아틸라를 국제적 전쟁에 뛰어들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가 바로 그 여인. 호노리아는 450년 동생을 황제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추방됐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했다. 아틸라는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로마제국의 절반을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 랑스, 오를레앙 등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서로마 중심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훈족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해 아틸라에 대항했다.


451년 6월20일, 프랑스 트루아시(市)에선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각각 20만명에 이르는 대군이 참전해 15만명의 전사자를 낳은 대규모 전투였다.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표적이 됐다.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점령을 시작으로 파두, 베로네,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피난한 로마인들이 ‘베이네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베네치아란 지명이 바로 이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허망한 멸망, 유럽의 미움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도 허망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혹은 힐디코)라 불리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게르만족의 유명한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크림힐트란 이름으로 불리는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잠든 아틸라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틸라가 결혼식 날 과음으로 질식했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469년 동로마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배한 훈족의 대다수는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다. 그러나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했다. 또 몇몇 부족들은 프랑스와 스위스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들과 합쳐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의 세켈리족은 자신들이 훈족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드라큘라 백작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루마니아에서는 아틸라를 강력한 힘을 가진 드라큘라 백작의 원조로 여기고 있다.

아틸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세계 역사상 몇 명 되지 않는 지배자 중의 한 명이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강력함과 정열, 그리고 거대한 힘에 매력을 느낀다. 아틸라가 파괴와 약탈만 일삼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비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아틸라는 교묘한 협상을 통해 상대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로마를 상대로 말안장에 앉은 채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으며, 호노리아와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절반을 달라는 대담성도 보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동시에 유럽인들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유럽의 소설, 연극, 오페라 등에서 잔인한 폭군으로 나오기 일쑤긴 것. 단테는 ‘신곡’ 중 지옥편 제12곡에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틸라를 묘사했다.

1968년 1월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함선 프에블로호가 나포되었을 때 아틸라는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북한에 나포된 프에블로호 선장 리오드 버처는 북한측에 “아틸라 이래 가장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며 사죄했다. 이같이 아틸라가 서양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시아인인 그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등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훈족과 한민족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이는 훈족의 원류가 흉노(몽골계-투르크계)라 하더라도, 훈족의 지배집단은 서양계 투르크 민족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흉노가 몽골과 퉁구스, 기타 북방민족의 혼합체이지만 흉노의 언어 특성을 연구한 결과 그들의 정치적 지배집단은 투르크 계열이라고 추정한다. 시라토리 구라기치를 비롯한 학자들은 흉노가 투르크가 아닌 몽골 계열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흉노가 투르크 계열의 특징을 지녔다는 데는 동조한다.



훈족은 아시아계 민족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가야·신라 고분과 유사한 북방민족의 쿠르간, 훈족의 동복,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동복, 훈족의 편두.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투르크는 6세기 중엽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후 1493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오스만투르크 대제국(현재의 터키)을 이루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는 훈족을 일컬어 ‘형태 없는 돌덩이인 얼굴을 가졌다’면서 ‘피부색이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눈이 작다는 뜻) 코가 납작하다’는 것은 동양인의 얼굴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도 훈족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그들의 코는 모양이 없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두 개의 눈에는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꿰뚫어보는 이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고 적었다. 이 설명도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의 얼굴인 셈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자료는 그리스인 프리스코스가 묘사한 아틸라의 모습이다. 프리스코스는 449년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정에 머무르며 그와 여러 번 대면했다. 프리스코스는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는 ‘비잔티움사’ 7권에서 아틸라를 전형적인 훈족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는 아틸라를 ‘몸집이 작고 가슴이 넓고 머리가 컸다’고 설명하면서 ‘눈은 가늘게 찢어졌고 코는 납작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마천 또한 흉노를 전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 겨우 정수리에만 남아 있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째진 모양이다.’

한편 흉노의 후손인 후월(後越)의 태자 손진(孫珍)이 한인(漢人)의 시중(侍中)인 최약(崔約)이란 자에게 안질 치료법을 질문한 일화는, 몽골인과 중국인의 외모가 구별됨을 보여준다.

손진이 “눈을 어떻게 물에 잠기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최약은 “당신의 눈은 움푹 들어가서 바로 물에 잠길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손진은 최약 부자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 따르면 흉노인 손진은 한인과 달리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코는 높았다.

이처럼 흉노에 대해 사마천은 동양인으로, 최약은 서양인으로 묘사했는데, 많은 부족들이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흉노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투르크인들이 건설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손 터키인들과 한국인은 외모부터 명백히 구별된다. 터키인의 체격은 유럽인, 특히 고대 로마인에 비해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코 역시 유럽인만큼 높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들이 훈족의 지도자를 알타이어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투르크 왕자’라고 불렀기 때문에 훈족이 곧 투르크족이라고 짐작되었다. 더욱이 역사적으로도 투르크인이 결속된 종족으로 부상하던 시기는 훈족이 유럽으로 진출했던 때보다 200∼300년 늦은 6세기부터이다.
 

60만명에 이르는 상비군을 둔 서로마제국은 야만족인 게르만족에 의해 476년 멸망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은 게르만족을 몰아낸 장본인이 게르만족보다 더 야만적인 훈족이란 점이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가 훈족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역사학자들은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훈족이 유럽을 침공해 제국을 세우긴 했지만 훈족의 유럽 지배가 겨우 100년(375∼469)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동·서양 주름잡은 우리의 선조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 및 사료들을 한민족의 그것과 연결시켜볼 때 훈족의 지배집단을 한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는 한민족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4∼5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유린했으며,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시아 동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물론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및 신라(진한)와 더 가까운 관계로 추정되지만, 이들 모두는 한민족이다. 아틸라를 한민족의 선조라고 간주할 때 우리는 4∼5세기경 각각 서양과 동양에서 패자로 군림한 당당한 두 선조,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출처:
http://www.dragon5.com/news/news20031101.htm
백산학보 연구논문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pds2&y_number=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