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출전이 불분명하다고 우겨서 올립니다.
다 그러리라고 짐작해서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돌궐문자 드립도 나오는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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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의 가림토문자 실체 확인
베일에 싸여왔던 고대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신비를 벗고 있다. 강단학자에게는 <실체없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백안시를 당해왔던 가림토문자, 반면 재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 고유의 표음문자로 숭앙돼 왔던 문제의 고대문자 원형(原形)이 초대형과 대형의 금석문 형태로 2종이 동시에 공개(본보 1994년 12월 26일자, 일부지방 27일자 보도)된 것이다.
이 탁본은 우선 재야사학자 김인배-인문 형제가 지난 19일 공개했던 일본 마토노 신사 석비 4基의 고문자의 성격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문제는 조작이라는 혐의 아래 아예 학문적 분석의 대상에서 제쳐져 있던 가림토 문자에 대한 실체 확인과 연구에 불을 댕길 것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성학계와 재야사학계간에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고조선 등 상고사 연구에도 진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가림토 문자는 현재의 한글 자모와 형태가 비슷하고, 표음문자라는 밀접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세종이 독창적으로 창제했다고 알려져 온 훈민정음과 가림토와의 관계 등도 규명이 요구되고 있다.
우선 탁본의 솜씨와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만주탁본에 음각된 글자수 7백여개는 종래 수십자이거나 많아야 2백여 글자 안팎에 불과하던 금석문 발견에 비춰 국내 초유의 정보량 수록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번 탁본은 모서리가 상하로 각각 잘려 있어 본래의 비석은 현 탁본보다 훨씬 컸음이 확실하다. 이 정도 비문이라면, 규모면에서만 봐도 상당한 국가권력이 동원된 기록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주탁본을 가림토 문자의 원형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는 최근 들어 사서로서 가치를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38글자와 글자꼴이 너무도 흡사한데다가 자모의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요소 때문이다.
가림토 문자에 대한 근세적인 언급은 고려시대 이암(李嵒)의 저서 <단군세기>에 나온다. 제3세 단군 가름이 을보륵에게 정음 38자(상기 그림 참조)를 짓게 했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인 자모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만주 탁본중에는 가림토 문자와 상당부분 자모가 일치한다. 또 가림토 자모와 형태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림토 문자 음가(音價) 확인에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주는 흥미로운 자모도 있다. 만주 탁본을 본 김씨 형제는 탁본이 등장하는 U는 가림토 39글자의 U와 같은 것이자, 현재 한글의 ㅂ 과 같은 음가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일본의 마토노 신사의 비석에서 보이는 U ㅏ 의 음가를 현재 한글의 [바]로 읽을 경우 문맥이 바로 통한다는 점이다.
만주탁본의 성격 규명에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글바위골(경북 경산군 와촌면 강학동) 탁본이다. 기호로서 추상도가 높은 만주 탁본과 비교해 거의 상형문자에 가까운 점이 특징인 이 금석문은 자연상태의 균열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인공적 작업의 결과로 판명됐다.
그러나, 가까운 중세나 현대의 각인 솜씨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일본 신사비석은 물론 만주 탁본보다도 시기가 외려 앞서는 관계로 보아 가림토 문자가 정착되기 훨씬 이전 형성기의 금석문으로 보인다.
탁본을 공개한 정도화(鄭道和) 교수와 경상대 여증동(呂增東) 교수(61세, 국문학과)는 “만주와 글바위골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말했으나 마토노 신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지난 19일 공개된 마토노 신사의 비문은 李寧熙씨의 견해처럼 神代문자의 한 종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얘기다. 정․여교수의 견해는 만주탁본과 일본 마토노 신사의 문자는 연계관계가 없는 각각 독립적인 기호 내지 문자라는 것이다.
반면 김인배, 인문 형제는 새로 공개된 2종의 탁본은 가림토 문자는 물론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문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주장, 정․여교수와는 상반된 새로운 시각을 보였다. 이런 가설을 세울 경우 미궁에 빠져 있는 가림토 문자의 음가추적과 해독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이 김씨 형제의 적극적 견해다.
이에 따르면 글바위골 탁본은 가림토 문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면, 만주탁본은 단군세기 38자 정착 직전의 자모꼴을 보여준다. 또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진공속에서 이뤄진 창조]라기 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새로운 체계화 작업 결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자모를 늘어놓는 병렬형 글자인 가림토 문자를 자모를 조합시키는 형태로 바꿔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다음 기사 참조)
그렇다면 역시 조합형인 일본 마토노 신사의 비석의 문자란 가림토의 일본적 변형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훈민정음이 가림토의 15세기 한반도의 자체적인 변형이자 체계화라면 마토노 신사의 문자 역사 뿌리를 가림토에 두고 있는 또 다른 일본의 변형이라는 얘기다.
즉 신대문자란 것도 말 그대로 야요이 시대 등 일본의 신화시대 문자란 뜻인 데, 별도의 체계를 갖는 문자라기보다는 가림토 문자의 일본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경우 고조선의 강역이나 문화적 영향력이 만주를 비롯해 한반도와 대마도를 포함한 일본열도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김씨 형제는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가림토 문자로 된 금석문이 고형이든, 아니면 보다 발전된 형태이든 간에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일본지역에서 나오고 있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정․여교수도 동의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가림토 문자 금석문은 앞으로 중국지역과 티베트 지역 등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해온 고조선 문화의 강역에서 얼마든지 추가로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탁본의 동시 발견은 가림토 문자의 실체가 분명하다는 증거이자 아직은 미해독인 가림토 문자의 해독 가능성에 한발짝 다가 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가람토문자를 한글의 고문자이자 고조선의 고유문자로 보는 것을 다분히 <심정적인 好古취미>이자 국수주의 발로에 따른 비약이라는 기성학계의 외면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외면 태도는 아무리 가림토 문자이고 고조선이라 해도 보편성의 기반 위에서 거론돼야 한다는 시각 때문이다.
즉, 현재 거론되고 있는 가림토 문자의 경우 추정되는 제정 연대가 최고 기원전 200 내지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나일강 하구에서 18세기말 나폴레옹군에 의해 발견돼 훗날 해독했던 로제타스톤 위의 고대 이집트 문자(디모딕)만 하더라도 기원전 196년경의 문자로 판명이 됐다. 그렇다면 가림토 문자의 실체를 기원전 3000년으로까지 소급하는 것은 인류사의 발전단계와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는 독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런 논란은 만주탁본의 내용이 해독될 경우 폭발적인 반향과 함께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주탁본의 공개에 따라 훈민정음과 가림토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제 첫발을 딛게 됐다. 지금까지 기성 국문학계의 훈민정음에 대한 접근은 한글의 독창성을 [방어]해야 한다는 다분히 국민정서 차원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만주 탁본과 글바위골 탁본의 공개는 훈민정음 제정의 모태이자 기반으로서의 가림토문자에 대한 주목의 계기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 경상대 국문학자 여증동교수는 중요한 전거를 들고 있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발문을 쓸 때 “ (훈민정음)의 글자꼴은 옛 글자를 모방했다 : 자방고전(字倣古篆)”고 뚜렸한 명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 때 [고전(古篆)]이라는 용어를 두고 지금까지 한글학자들은 몽고어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교수는 [전(篆)]이라는 말의 원뜻은 [꼬불꼬불한 글자]인 데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일반 민중에게 알려져 있던 문자이고 이번 만주탁본에서 모습을 드러내 가림토를 참조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또 성삼문 등의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기초조사 단계에서 당대의 일급 언어학자인 몽고의 황찬을 여러 차례 찾아갔던 일화도 당시 이 지역에 남아있던 가림토 문자를 참조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여교수는 말했다.
이런 가설이 맞을 경우 훈민정음은 단순한 창작이라기 보다는 가림토의 후광(後光)아래 이뤄진 <가장 오래된 글자>중의 하나라는 새로운 특성을 더하게 된다.
연세대 문효근(文孝根)교수는 지난 3월 훈민정음의 창제 당시 중국 후한 때의 한자 해설서이자 언어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텍스트를 참조했다는 설을 발표한 바 있다.
문교수의 주장은 훈민정음이 15세기 당시까지 이뤄진 언어학의 주요성과들을 토대로 창제됐음을 말해주는 근거로 더욱 주목된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의 지평에 가림토 문자가 포함됐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다음은 이번 공개된 경산 글바위꼴 탁본과 만주탁본 및 일본 신대문자 비석의 탁본이다.
<문화일보>. 1994년 12월 28일 조우석 기자
출처:http://vbvghtt.egloos.com/3408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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