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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ul Korea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 과 배달국 제18세 커붉단한웅 [倍達國 第18世 居弗檀 天皇]

by 두루물 2010. 11. 16.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 과 배달국 제18세 커붉단한웅 [倍達國 第18世 居弗檀 天皇]

* 우리 민족이 사는 온누리를 쥬신(朝鮮, 肅愼)이라 한다.

           [민족의 기원 - 바이칼호의 전경]
* 우리 민족은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여, 바이칼호를 거쳐 불함산으로 이동 정착하였다. 불함산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집단 정착 문화를 발달시켜, 서기전 6000년경에는 홍산문명을, 이어서는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 우리 조상들은 이미 서기전 3898년에 배달나라를 세우고, 농경민족인 중화족을 제압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 배달나라는 18대 1565년으로 끝나고, 그 뒤를 이어 단군쥬신이 세워졌다.

* 단군쥬신은 아사달을 도읍으로 제국을 형성, 신(진)쥬신을 중심으로 말(마)쥬신과 불(번)쥬신의 세 단군이 넓은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다.

* 개아지 쥬신(기자조선)이나 위만쥬신(위만조선)은 쥬신 제국의 지방 제후국이었다. 따라서, 한무제의 위만쥬신 정벌은 중화족과 지방 정권과의 투쟁이었으며, 중국사서가 고집하는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은 한무제 퇴치에 공이 큰 장군들에게 분봉한 영지였다.

* 단군 쥬신이 나약해지자, 해모수의 부여와 동명왕의 가우리를 함께 계승한 고두막루칸이 제국을 아우르고 졸본부여를 일으켰다.
* 부여가 일어나면서 제국의 권위가 떨어져 지방 세력이 성장하였다. 서기전 3세기경에는 황하 상류에 살던 동호족의 한 갈래가 흉노에 밀려 남하, 서기전 57년에 서울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실라(신라-新羅)이다. 실라는 이후 마한, 백제와의 투쟁과정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서라벌로 옮긴다.

* 서기전 37년에는 졸본부여에서 성장한 추모(고주몽)가 부여를 탈출 졸본지방에 이르러 가우리(고구려)를 세우고, 이어 북만주 일대를 통일하였다. 이때 가우리 건국의 공신 협보가 일본지역으로 달아나 최초의 나라 다파라국을 일본지역에 세웠다.

* 백제는 가우리 건국 과정에서 배신감을 느낀 황비 소서노와 그 아들 비류, 온조가 가우리를 탈출, 비류호 지역에서 독립한 나라이다. 이후 백제는 요서 지역으로 옮겼다가(외백제) 다시 충청남도 아산 지역(목지국)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온조가 독립, 십제(한성백제)를 세웠으니, 백제의 아우 나라이다.

* 아산에 정착한 비류백제는 요서, 산동, 일본 지역을 포함한 넓은 해상 제국을 세우고, 각지에 담로를 두어 다스렸다.

* 가우리의 제국 통일로 중앙 정권에서 밀려난 옛 쥬신의 중신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한반도 남부로 밀려왔는데, 그들에 의해 6가야 연맹이 성립되었다.

* 가야가 신 영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일본 진출의 교두보로 설치한 것이 이른바 임나이다. 임나는 우리말로는 참고 견딘다는 뜻이고, 일본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주군이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 가야의 일본 진출 이후 왜 열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백제, 가우리, 실라가 다투어 그 지역에 진출했는데, 가야 계통인 가라, 아라, 신라계통인 무라, 백제 계통인 곰, 담로 등과 관련이 있는 지명은 모두 이 시기에 개척된 곳이다.
 
* 비류백제의 일본 지역 통치 과정에서 백제 황통의 계승을 위해 전 담로를 제압하고 세운 것이 바로 천황 국가의 시작이다. 이 때의 토벌장군인 경진주는 백제의 대장군이었고, 천황 선선저도 백제에서 파견된 백제 황족이었다.

* 신무왕은 현지처를 취한 선선저 황자를 대신해 백제에서 보낸 새로운 천황으로서, 왜 열도 동부 정벌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 실라 왕자 천일창의 왜 열도 공략 이후 혼슈 지방을 둘러싼 백제, 실라 간의 다툼이 격화되었는데, 가우리도 곰벌을 근거로 세력다툼에 뛰어들어 왜열도가 전화에 휩싸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제는 경행왕을 파견하였다.

*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실라에 망한 마한 유민의 왜 열도 이주를 가리키며, 이 세오녀가 바로 비미호이고, 그 딸이 신공 여왕이다.

* 해상 제국을 이루었던 비류백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본국 곰나루를 빼앗기고 일본 지역으로 피해 갔는데, 이 이가 응신천황이다. 응신은 나라백제를 세우고, 그곳을 중심으로 본국의 곰나루백제를 지배하였다.

* 곰나루백제의 혼란을 틈타 실라는 왜 열도에서의 세력 만회를 꾀하였다. 이 때 실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본의 개혁이 이른바 다이카 개신이다.

* 부여 천도 후 내정을 정비한 백제가 실라를 압박하자, 실라는 가우리의 중원 통일을 위한 전 민족적 협력 제의를 물리치고 당과 야합, 백제를 멸망시켰다.

* 본국 백제의 멸망을 본 나라백제는 전 국력을 동원해 본국의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파견군과 본국 홍기군과의 불화로 실패하였다.

* 백제 멸망 후 당은 중국인의 숙원인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번번히 가우리의 강력한 힘에 막혀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 가우리는 연개소문 사망 후 그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권좌에서 밀려난 남생이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어이없게 자멸하고 말았다.

* 쥬신의 전통을 계승한 가우리는 이 때 우리 민족 관련 기록들을 민족 보호 차원에서 모두 소각했는데, 이 때문에 그 후의 우리 역사가 왜곡되었다.

* 가우리 자멸 후 그 유장인 대조영, 이진충 등이 협력, 당에 대항하면서 민족 부흥을 내걸고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그 영토와 건국 정신에서 고구려 계승 정신을 뚜렷이 하였다.


대씨 가우리 입국
* 서기699년, 대중상 황제에 이어 황위에 오른 대조영은 이 해에 개원하여 천통이라고 국호를 대진국이라 하였다.

* 옛 가우리를 이끌던 고씨들이 적극적으로 새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대씨가우리는 곧 안정을 찾게 되었으나 북국의 강력한 흑수부와의 협상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천 년에 걸친 부여족(고씨가우리)에 대한 원한으로 흑수부가 새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까닭이었다.
* 대조영은 조각을 단행하고 태자 대무예를 보내 당과 상호 승인 협정을 맺은 뒤 황제의 외삼촌인 대무예를 주당 초대 대사로 파견하였다.

* 서기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대무예가 제위에 올랐다. 모든 이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 하였으나, 제위를 노리던 대문예는 역모를 꾀했고 이에 실패하자 당으로 달아났다. 이 와중에 역모에 연루되어 흑수부의 대칸 예속리기가 처형되었고, 이로써 어렵게 민족 통일은 달성될 수 있었다.


대당 징벌 전쟁
* 당 징벌전을 벌이기에 앞서 대무예는 당의 동맹국 실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인의 등을 일본에 파견, 동맹을 맺었다, 장문휴를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당조의 목을 조여 가던 중, 실라의 이적 행위로 인하여 눈물을 머금고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장문휴는 산동지구의 가우리 유민들로 등주군을 조직하고 산동을 중심으로 한 점령 지구를 지키게 하였다. 이적 행의를 일으킨 실라군은 무참하게 섬멸되었다.


세종광성 문황제
* 서기 737년, 대흠무가 제 4대 제위에 등극하였다. 대흠무는 문치에 힘써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거란인 안록산을 사주하여 대당 분쇄전을 시도하였으나 거듭된 대연국(서기 756년에 안록산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국을 세운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의 내분으로 결국 이적치적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동이의 고지 산동 반도
* 산동반도는 동이족과 화산족의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흠무는 이정기를 요양황으로 봉하고 등주에 대가우리의 대표부를 설치하였다. 이정기는 산동 반도를 완전히 통일하고 당의 대동방 무역을 독점하였다. 대가우리와의 교역이 늘어나 양국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반면 당은 이정기의 자비심에 의존해야 하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이 시기 대가우리와 일본과의 무역도 대단히 활발하였다. 일본의 급격한 문화발전은 바로 이때 이루어졌다)

* 제국(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나라로 개명하였다)의 제4대 이사도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당의 동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또한 실라(신라)의 이적 행위와 이사도가 피살됨으로써 실패로 끝났고 제국은 결국 망하고 말았다. 모처럼 다물(多勿)했던 불쥬신의 청구땅(산동지구)은 다시 화산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동경천도와 대원의의 난
* 그러면 제나라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던 대가우리의 속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미 노령에 접어든 대흠무 황제는 당 토멸에 가장 큰 장애물인 실라를 제거하기 위해 남쪽 국경의 동경성으로 천도하고 남정군을 조직하여 대원의를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흠무 황제가 쓰러지자 대원의와 황자들 사이에, 또 황위쟁탈전이 벌어져 제나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황권은 막내 황자인 대숭린에게 돌아갔다.
 
 
불쥬신의 후예들
서기 872년 부여족으로 구성된 거란 세라부에서 거란의 대영웅 야루철리지가 태어났다. 서기 901년 이리근(군사령관)에 오른 야루철리지는 서기 906년 마침내 대망의 칸으로 선출되었고, 국민들은 그를 국부 즉 아버지(중국 발음으로 아보지)라 불렀다. 거란 전통의 3년 질립제를 해제하고, 거란 제부를 완전히 통일한 아버지는 마침내 서기 916년 황제위에 올라 대가우리 정벌에 진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황숙 할저와 그의 두 아들이 대가우리로 거짓 망명하였고 황위를 노리는 대가우리의 정보부장 대소현과 밀약을 맺은 뒤 돌아왔다.

대씨 가우리 제국의 최후
서기 925년 12월 아버지 황제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대가우리 원정길에 올랐다. 거란군은 대소현의 안내로 가우리의 요새들을 교묘히 우회하여 전광석화 같이 대가우리의 도성인 홀한성을 공략 대가우리를 멸하고 동단국을 세웠다. 그러나 대가우리의 각 지방군들이 기병하기 시작하였으니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셈이었다.
격무에 시달리던 아버지 황제가 죽자 태자이며 동단국의 왕인 인황왕과 거란의 병권을 쥐고 있던 둘째 황자 요골사이에 치열한 황위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 인황왕은 대가우리 다물군의 공격목표가 홀한성임을 깨닫고 요양으로 천도하면서 홀한성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왕씨 가우리의 천하통일
서기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호족들과의 정략적 결혼 정책을 통해 국력을 하나로 통합해 갔고 또 대가우리가 망하면서 망명해온 유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국력을 다져나갔다. 이때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후 백제의 견훤이 왕자 신검 등에게 유폐되었다가 탈출, 왕건에게 투항하여 왔고, 실라왕 김부가 천년사직을 들어 왕건에게 의탁하였다. 왕건은 나머지 신검군을 섬멸하고 963년 마침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대김(金) 제국
시조 김함보부터 시작된 김나라는 왕씨 가우리 및 대요제국(거란)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다. 서기 1115년 정월 김아구타는 황위에 올라 국명을 대김제국이라 하였다. 대김제국이 대요제국과 최후의 승부를 겨루어 승리함으로써 천하의 주인 자리는 불쥬신계에서 다시 신쥬신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강력했던 동이의 제국 김나라는 1234년 몽골(원)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으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나약한 세습왕의 친정체제로 돌입함으로써 결국 출육환도하게 되었다. 이때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은 출육환도에 반대하고, 왕족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옹립, 반몽 정권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려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려몽 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몽골의 요청에 고려는 기꺼이 응했다. 고려로서는 당시 고려해안을 심히 어지럽히던 대마도 및 일지도 등의 왜구 토벌이라는 당면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일본 원정은 일본 일대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는 당초의 왜구토벌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개선할 수 있었다.

최무선
두 차례에 걸친 해적 소탕전으로 일시 주춤했던 왜구들이 다시 고려 해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334년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고 일본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내전에 돌입함으로써 백성들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따라서 이들이 다시 도적떼가 된 것이다.
최무선은 왜구들을 바다에서 원천 봉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화약과 화포 발명에 진력하여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1389년 박위는 전선 백여척을 이끌고 나아가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이 작전은 고려의 마지막 해군 작전이었다. 고려는 3년 후에 있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망하고 말았다.

역성혁명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한족들이 몽고를 몰아내고 명을 건국한 뒤,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왔다. 이는 실지 회복이라는 고려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고, 급기야 고려는 1388년 요동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다.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끝까지 요동정벌 철회를 주장하다가 마지못해 출정한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을 단행하고야 말았다.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이성계는 문신을 우대하였고 그 결과 조선의 군사력은 점차 무력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아버지의 화약 제조법을 더욱 개량 발전시켜 훗날 이순신 함대를 통해 그 위력을 증명하게 된다.

조선 해군과 대 제독 이순신
이씨 조선은 한동안 태평세월을 맞이하였고 당파싸움만 일삼았다. 반면 일본은 1460년 영주들간의 혈전이 시작되고 있었고 이후 약 120년간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계속 되었다. 1536년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최강자였던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전국을 통일하고 눈을 밖으로 돌렸다. 조선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온 정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의 진술이 엇갈려 설왕설래하다가 조선은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배달국 제18세 커붉단한웅 [倍達國 第18世 居弗檀 天皇]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

커붉단 한웅
 

개천(開天) 1518년: B.C 2380년, 커불단(또는 커붉단) 태자는 배달국 제18세 한웅으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 동안 배달국[倍達桓國-밝달한국]은 천해(天海-바이칼호)로부터 동쪽으로 옮겨와 븨류호로부터 영고탑까지의 넓은 북만주를 정복하며 정착에 성공했고, 또 중국 산동성일대에 대한 중화족들과의 마찰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커불단한웅은 지금까지 고수해오던 정책을 바꾸어 서서히 남쪽만주(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와 함경도일대)일대를 욕심내기 시작한 듯 보인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남만주일대는 기마민족인 민족이 서쪽으로부터 이동하여오기 훨씬 전부터 먼저 정착하여 살고있던 농경토족(農耕土族)들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의 고기(古記)에 보이는 웅족(熊族)이 그들이다.
웅족의 웅(熊)자는 곰이라는 뜻인데 이 글자는 우리의 옛말로 지신(地神)을 의미하는 “”의 발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선택한 글자이므로 웅족(熊族)은 곰족이 아니라 족(감족)이라고 읽어야 옳을 것이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해 보이는 이들 두 종족의 결합은, 새로 침략해 오고 있는 배달국족을 하느님을 부모로 하는 천손족(天孫族)으로 하고, 선주 농경토족인 족을 지신족(地神族)으로 하여 하늘과 땅이 절묘하게 결합하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들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족의 이웃에 또 하나의 종족이 보이는데 고기(古記)는 이들을 호(虎)족이라고 쓰고 있다. 호(虎)는 호랑이를 뜻하므로 족을 곰(熊)족으로 쓰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과 분쟁상태에 있는 그들을 호(虎)족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호(虎)족과의 싸움에서 밀리게 된 족들은 북쪽의 강국(强國)인 배달국과 협상을 제의하고, 족의 공주를 커불단한웅에게 시집보내면서 동맹을 요청한다. 이에 커불단한웅은 지신(地神)의 지위에 있는 녀(巫女)를 황후(皇后)로 맞아들이고 동맹을 받아들인 후 군대를 파견하여 족을 위기에서 구해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배달국의 황후가 된 녀황비는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시조(始祖)가 되실 단군성조(檀君聖祖)를 생산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그분의 덕망(德望)이 천인(天人)과 같아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의 나이 14살 때 족의 임검 웅씨(熊氏)왕이 그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그를 부왕(副王, 裨王)으로 삼아 임검을 대신하여 나라일을 행하게 하였다.’

이상의 기록은 그대로 믿어도 좋아 보인다. 녀황비(熊女皇妃)는 단군성상(檀君聖上)의 나이가 14살에 이르자 이제는 제왕이 될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황자(皇子)를 족의 나라로 보내어 이미 늙고 기력을 잃은 친정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이끌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단군(檀君)께서는 무려 24년 동안 족의 나라를 통치했는데 그 동안 늙은 외조부(外祖父)가 죽자 나라의 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나라를 일약 강국의 위치로 올려놓은 듯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개천 1565년, 상달(上月-10月)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임검(壬儉)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檀木)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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