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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ul Korea

서역을 정벌한 한국의 징기스칸, 고선지장군

by 두루물 2011. 8. 17.
고선지 정벌 루트


고선지 (高仙芝 ; ?~755)
고구려 출신의 당(唐)나라 장수로서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이었던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갔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또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놈’이라고 한 욕설에서도 알 수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羌人)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중국에 동화된 이민족 사이에는 상대방을 욕할 때 종족적 멸시를 호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한 예가 호장(胡將) 안녹산(安祿山)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이는데, 그 기준은 한화(漢化)를 잣대로 하여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있다.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將軍)에 올랐으며,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夫蒙靈樽)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740년경 병력 2,000명을 데리고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티벳)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토번족의 정벌 임무를 띠고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 지금의 Shignan지방)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힌두쿠시준령을 넘어서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하고, 사라센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이 1차원정에서 불름(佛: 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에 호송한 공로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나,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했기 때문에 이듬해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기 위해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다가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을 하여 크게 패하고 후퇴, 귀국 후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우군을 구원하기 위해 방어 담당지역을 무단이동한 사실에 대하여, 평소 사원(私怨)을 품고 있던 부관인 감군(監軍) 변영성(邊令誠)이 과장하여 현종에게 밀고(密告)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