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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ul Korea

삼성기,단군세기 우리는 무엇인가

by 두루물 2011. 5. 8.


삼성기,단군세기 우리는 무엇인가

삼성기 (전상편)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지금의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 이 흑수(黑水:흑룡강을말하며 중국말로는 살합연오라 러시아말로는 아므르) 백산(白山:백두산 또는 중국의太白山)의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중생을 돌보는 직책)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지금의 아버지로 고대에는 국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한다.)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중국 산동반도의 동래지방, 동양의 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가 동이. 조선. 청구 다 우리 민족을 칭하는 말이다.)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분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철인들이 보살피도록 하시더니 웅씨(곰이라하나 옛날의 곰이라함은 신을 뜻하는 말이다. 풀어쓰면 "ㄱ.ㅁ"이라한다. 일본에서는 신을 "가미"라 한다)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14세 자오지한웅)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백두산 또는 완달산)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순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시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로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 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 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 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혜제때 연나라 추장이였던 위만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난하)의 남쪽으로 옮겨 갔으나 한떼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성기 (전하편)

삼성기,전하편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하는데 꿈에 천신이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우리민족의 옛조상을 가리키는 말)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옛날 한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한임(하느님)께서 천산(天山:천산산맥 동쪽의 기련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로래로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 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한임,고시리한임,주우양한임,석제임한임,구을리한임에 전하고 지위리 한임에 이르더라. 한임은 혹은 단임 이라고도 말한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중국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바이칼호 또는 북해)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통틀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캅차카),일군국, 우루국,객현 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사납아국,선비국(퉁구스),수밀이국(서양의 인류학계가 주목하는 슈메르 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수밀이국이다.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는 12연방국가였다. 중국에서는 12연방 국가인 한국을 숙신이라 불렀다.)이니 합하여 12국이다. 천혜는 지금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한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할 곳이로다"하시며 누구를 시킬것인가 물으시니 오가(마가.우가.구가.저가.양가)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뜻이 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모범이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감숙성 돈화현 삼위산은 저 유명한 돈황학의 본고장인 돈황동굴이 있는곳이다. 480굴 정도의 굴이있는데 그 굴의 벽화에는 고구려인의 벽화와 단군신앙벽화가 그려져 있다.)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 수 밑에 내려 오시니 이곳을 신시(신시개천을 한분은 단군이 아닌 한웅님 이십 니다.)라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생사를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2여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때에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찌기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데 변하여 신계의 한 무리(맹氓이라 함은 외래의 이주민, 외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가 되어지 이다"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 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놓았으니 즉, 쑥 한 다발과 마믈 스무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데 "너희들 이를 먹고 햇빛을 백일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 두마리가 모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기(忌)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잘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며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 바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수(壇樹)의 무성한 숲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였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한(桓)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靈籍장부)에 실리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배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니 무리들이 잘따르게 되었다. 이로 부터 후에 치우천황이 이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화백이라함은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때의 제도로 알고 있으나 여기 나와 있는 말로 미루어 보아 화백제도는 신라때 새로 생겨난 법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오래전에 있었던 법을 되살린 것이라 할수 있겠다.)을 하였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세나라가 아닌 세임금을 뜻한다, 진辰.번番.막莫이라는 세조선을 통치하는 임금을 뜻한다.)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 불렀다. <밀기 密記>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 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지는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찌기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 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추장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한웅(신시역대기에 의하면 제10세 한웅에 해당함.)이 나셔서 염제신농(중국의 삼황가운데 두번째 황제. 농사.의약의 시조라한다.B.C 3218 ~ 3078)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하였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한웅(십사세 한웅,치우천왕 이라고도함)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 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 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산동성 임치현 동남쪽 여수의 남쪽에 있는 성명)로 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중국삼황의 하나로"황제가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만신을 부르고 불렀다"라고 중국사서에 기록되 있으니 그또한 동이족임을 증명하는 말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황제 헌원을 아카드왕 사루곤을 모델로한 거짓역사라 하며 중국 삼황의 존재를 거부했고, 자신들을 실크로드의 주역인양 하며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자신들의 황국사관에 꿰맞추려 하였다.)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하북성 탁록현의 동남에 있다.)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치우가 졌다 하고 북애자의 규원사화에서는 치우의 승리라 하고있음. 그리고 삼성기에서도 치우의 승리라 하고있음.)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서쪽으로 계곡고신(황제의 증손이니 극의 아들이다.)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떼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아마도 요임금 즉 제요효당을 가리키는것 같다.)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문자의 조상이라 알려진 중국사의 전설적인 인물 황제의 신하로서 새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지었다 한다.)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 헌원이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 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극히 횡포 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없을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재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볼수있는 한가가지가 있습니다. 사마천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쓰기위해 우리민족을 낮추어야 했고 그러한 이유로 탁록의전투의 승자를 황제헌원이라 했습니다,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볼때 북애자의 규원사화의 내용이 좀더 사실에 접근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마천이 중국적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우리민족의 단군이신 치우천왕을 곡해했음이 여기서 단적으로 들어나고 있습니다.) 삼성기



삼성기 (신시역대기)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뒤에 청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1세를 한웅천황이라 하며 또 거발한이라 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사셨다. 2세는 거불리한웅이니 재위 86년 102세까지 사셨다. 3세는 우야고한웅이니 재위 99년 135세까지 사셨다. 4세는 모사라한웅이니 재위 107년에 129세까지 사셨다. 5세는 태우의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6세는 다의발한웅이니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7세는 거련한웅이니 재위 81년에 140세까지 사셨다. 8세는 안부련한웅이니 재위 73년에 94세까지 사셨다. 9세는 양운한웅이니 재위 96년에 139세까지 사셨다. 10세는 갈고한웅 또는 독로한이라 하니 재위 100년에 125세까지 사셨다. 11세는 거야발한웅이니 재위 92년에 149세까지 사셨다. 12세는 주무신한웅이니 재위 105년 123세까지 사셨다. 13세는 사와라한웅이니 재위 67년에 100세까지 사셨다. 14세는 자오지한웅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 까지 사셨다. 15세는 치액특한웅이니 재위 89년에 118세까지 사셨다. 16세는 축다리한웅이니 재위 56년에 99세까지 사셨다. 17세는 혁다리한웅이니 재위 72년에 97세까지 사셨다. 18게는 거불단한웅 혹은 단웅이라 하는데 재위 48년에 82세까지 사셨다.

단군세기 (고기에서 말한다)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밝달나무밑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B.C.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裨王)으로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B.C.2333)년 제요도당(帝堯陶唐)떼에 단국(檀國)으로 부터 아사달의 단목(檀木)의 터에 이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무진 원년(戊辰元年 B.C.2333),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떼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허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숙신)이라 이름했다.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 하늘의 법칙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참마음을 다할 것이니 이로써 너희 마음이 곧 한님을 보게 되리라. 하늘의 뜻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라. 이런 까닭에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뜻에 잘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잘 쓰일 수가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다만 너희 부모를 옳게 받아들여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또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 되고 효도함이니라.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먼저 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헤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목하여 원망함 없고 질투함도 없고 음란함도 삼갈 것이다.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사랑할지언정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울지언정 서로 다투는 일이 없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여서로 어쩌지 않고 함께 일하여 서로 빼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리라.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도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읽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들을 사랑할지니라. 저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가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한몸은 물론 집안까지도다 사라지리라. 너희가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쁜 것을 감추지 말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로써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지어다. 이에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는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배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하고, 우에겐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더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정사50년(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帝)께서는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牛首는 즉 소머리, 쇠머리를 뜻하니 고대의 발음으로는 슈메르, 수밀이국, 소말들과같은 역사적 지명일 것으로 추측된다.)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경자 93년(B.C.2241), 단군께서 버들궁궐에 계셨는데 흙제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단목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 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은 물건들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에 까지 미쳤으니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 갔다.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에 붕어 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에서 붕어 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더라.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신축 원년(B.C.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품과추위에 시달리는자 없었다. 봄 가을로 나라안을 두루 살피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량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제순유우(중국 삼황 오제의 한사람)가 유주 영주의 두 주를 남국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다 쫓아내 시고, 동무와 도라등을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 하였다.

임인 2년(B.C.2239), 단제께서는 소련.대련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대련은 상을 잘치루었으니, 사흘 동안을 게을리 하지 않고,석 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가 지났을 때까지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이 때로부터 온통 풍속이 변하여 상을 치룸에 다만 다섯달로 멈추던 것을,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 었다.

계묘 3년(B.C.2238)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 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 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하였다.

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

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듯 산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도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 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그릇에 쌀을 가득 담아 단위에 올려 놓앗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이 새록 즉위 했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경자 2년(B.C.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고대의 상형문자)이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 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38자(세종실록에 의하면"10월초, 친히 말글 28자를 정하시니 그 글자는 옛전자를 모방하였다"라고 되어 있으니 한글은 세종대왕때 만들어 진것이 아니라 옛글을 다듬은 것이라 볼수있다.)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가림은 사물을 분별한다는 뜻이고 토는 토를 단다는 말로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라고 해석할수있다. 이것을 미루어 볼때 교착어 임을 알수 있다. 한글학자들이 이를 연구가 필요한 바이다.)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신축 3년(B.C.2180), 신지인 고을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B.C2177),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갖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B.C.2175),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티벳지방이라 생각됨, 우리 조상들의 역사적 무대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었다. 그 당시에는 한반도라는 이 반도는 우리 조상들 조차 익숙치 않은 땅이었다.)에서 정벌하였다.

무신 10년(B.C.2173),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고대 일본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 하다가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서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일명 협야후배폐명이라한다. 일본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일본 말로는 니기하야히모노데루라 한다.)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일본열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B.C.2138),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 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48년 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골리한(한이라함은 임금이란 뜻이다.)으로 봉하다.

경인 7년(B.C.2131), 배만드는 곳능 살수의 상류에 설치 했다.

임인 19년(B.C.2119),하나라 왕상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 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에게 명령하여 람.진.변의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신유 38년(B.C.2100), 6월 단제께서는 붕어하시니 양가 구을이 즉위 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임술 원년(B.C.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을 쌓고 사자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달력,중국의 고서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사람은 회화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상나라의 동이 조상이다."라고 되어 있다.)

정축 16년(B.C.2084), 친히 장당경(치우천왕이 티벳의 장당경으로 옮겨가 800년동안 왕국유지 했다고 몽고의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있습니다.)으로 행차하셔서 삼신의단을 봉축(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를 봉축이라 하고, 땅에 지내는 제를 선제라 한다. 봉재는 천자만이 지내고 선제는 제후들도 지낼수 있었다고한다. 중국 학자의 연구에의하면 "천자의 호칭은 동이에서 시작된바요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 났기 때문에 천자라 한것이다."라고 했다.)하고 많은 한화를 심다. 7월 단제 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을 건너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으시사 곧 붕어하시니 대박산에 묻혔다. 우가인 달문이 뭇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 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계축 36년(B.C.2048), 단제께서는 돌아가시니 양가인 한율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 정미 54년(B.C.1994),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우서한 즉위하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무심 원년(B.C.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신해 4년(B.C.1990), 단제께서는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시고 돌아와 크게 관세를 고쳤다.

을묘 8년(B.C.198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술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 경인 35년(B.C.1951),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노을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을미 5년(B.C.1946), 궁문 밖에 신원목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사는 이들까지 기뻐하였다.

병오 16년(B.C.1935), 돔눔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미 질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중국에선 황하 또는 발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팡괴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팔괴의 시초라하고 삼서성의 낙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를 하도 낙서라 하는 것이다.)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윳판과같은 것이었다.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천문대)을 두었다.

기축 59년(B.C.1892),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9년 경인 원년(B.C.1891), 단제 께서는 오가의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정묘 38년(B.C.1854), 백성들 가운 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하므로써 위세를 보였다.

병술 57년(B.C.1835), 단제 붕어하시니 뒤를 이어 우가 아한이 즉위 햇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무인 52년(B.C.1738),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흘달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 갑오 16년(B.C.1767),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을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들은 거향을 떠나는 일이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누리에 넘쳤다. 이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 하였다.

무술 50년(B.C.1763), 소도를 만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기묘 61년(B.C.1722),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해를 넘겨 장사하고 우가인 고불이 즉위했다.

14세 단군 고붕 재위 60년 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 5천만인 이였다.

기묘 16년(B.C.1662),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 재위51년 경진 원년(B.C.1661)은 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B.C.1660),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 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 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에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B.C.1652) 가을 칠원 우루국사람 20인이 투항해오니 염수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기미 40년(B.C.1622),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경오 51년(B.C.1611),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우가인 위나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58년 무진 5년(B.C.155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68년 병자 68년(B.C.148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49년 병신 20년(B.C.1456), 지백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B.C.143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55년 경신 55년(B.C.138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 재위43년 계묘 43년(B.C.1341),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엿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B.C.1289),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 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되니, 그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으로 봉해줄것을 청햇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 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허락하였다.

을미 52년(B.C.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만주 요녕성 안산의 서남에 존재)에 이르러 부로 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 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사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라 부리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 여러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중국 서울 북경의 옛이름)의 자손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이나 요동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받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은나라와 여러 차례 싸워 이를 쳐부쉈다.

신미 36년(B.C.1250),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밑고 난을 일으 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해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계미 48년(B.C.1238),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을유 2년(B.C.1236),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여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서책을부수고 깊숙히 오지로 들러가 희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씨를 회 땅에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르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기해 76년(B.C.11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술 11년(B.C.1151),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25년 무인 88년(B.C.106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85년 계미 56년(B.C.998),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 기유 26년(B.C.972), 단제 붕어하시고 해모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경신 11년(B.C.961), 여름 4월, 태풍이 크게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B.C.954),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을 바쳤다.

정축 28년(B.C.944),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원년(B.C.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신해 34년(B.C.910),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내휴가 즉위했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병술 35년(B.C.87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들올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25년 신해 25년(B.C.850), 단제 붕어하시니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갑인 3년(B.C.847),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B.C.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B.C.837), 3월에 일식이 있었다.

신사 43년(B.C.82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 즉위하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계미 2년(B.C.818),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을사 24년(B.C.796),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을묘 10년(B.C.786),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윽 했다.

무진 23년(B.C.77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 했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갑술 6년(B.C.767),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무오 50년(B.C.723), 일본 웅습(熊襲:구마지방) 지방에 원주민의 난이 일어나 조선에 구원병을 청하므로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우가야후끼아헤즈노미꼬또(彦波武草葺不合尊)", 즉 신무천왕의 부친을 말하는 것이다.)을 파견하여 원주민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본 홈페이지 테마소고중 "고조선과 왜의 관계"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병자 68년(B.C.705),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 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갑진 28년(B.C.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갑인 38년(B.C.667), 협야후 배반명("일본서기"의 "니기하야히노미 꼬또"를 배반명이라 하는데 진국과 부여국의 조상이 된다. 뒤에 부여의 협보는 구마모또에 진출하여 다라국을 세우고 휴유가의 안라국과 연합하여 사마대국을 세운 인물이다.)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가 모두 평정 되었다.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는 병력을 보내 연나라와 제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갑술 58년(B.C.647),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했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경오 56년(B.C.591),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45년 을묘 45년(B.C.54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흘이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흘 재위 36년 신묘 36년(B.C.510), 태자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기유 18년(B.C.4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기사 20년(B.C.47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기묘 10년(B.C.4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 즉위하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을묘 36년(B.C.426),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수만의 군사를 가지고 도성을 공격하여 단제 께서는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모시고 해두로 피하신후 얼마후 붕어 하셨다.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B.C.425),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적병들이 큰혼란에 빠졌다. 구물 단제 께서는 군사를 이끌고가 적을 괴멸하고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에게서 추앙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 하셨다. 이에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라 하셨다.

갑신 29년(B.C.397),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 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B.C.396), 장령의 장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B.C.380),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B.C.365),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중국 문헌에 따르면 상운장과 하운장을 중심으로 위만조선과 번조선이 대치 하였다 한다.)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언 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막조선도 역시 이를 구원하여 대군을 보내어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B.C.364), 싸움에진 연나라 사람들이 연운도에 주둔하여 공격할 기미를 보자 우문언이 추격하여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B.C.350),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 말200 필을 바치고 연나라를 칠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B.C.343),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계속 침범해 오더니 마침내 화해를 청하여 조양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기묘 55년(B.C.342),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 원년(B.C.341), 12월 번조선의 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오가가다투어 일어났다.

무술 19년(B.C.323),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계해 44년(B.C.298),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B.C.296),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졌다.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후사가 없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써 추대받아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계축 48년(B.C.248), 시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것을 청하였으나 단제께서 허락치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B.C.239),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사를 일으키니, 그의 선조는 고리국(현재 몽고 내륙에 부여국의 모체라고 할나라가 고리국이다. 몽고 과학원의 수미야바타르 교수는 동명이 살았다는 흘승골 이 몽고의 할힌골 강이며, 비류는 몽고의 부이르 호수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또 몽고족의 한파인 부리아트인들은 지금도 스스로 코리라 부른다고 한다.) 사람이었다. 계해 58년(B.C.238), 단제 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하고 결단력이 없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날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단제께서는 오가들과 의논하여 오가들로 하여금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대통을 잇게 하라는 명과 죄수들을 풀어주라 명을 내리시고 다음날 왕위를 버리고 입산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를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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