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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ul Korea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by 두루물 2012. 5. 14.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History of Josun,Korea]

Brutally,Japanese Assassins assassinated The Last Empress of Korea illegally at her Palaces ,
Seoul in 1895. So a Korean assassin revenged on them.





http://ko.wikipedia.org/wiki/%EB%AA%85%EC%84%B1%ED%99%A9%ED%9B%84


명성황후 (明成皇后 ; 1851~1895)

  조선 고종의 황후로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성은 민씨(閔氏)이다. 여주(驪州) 출생으로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외동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그러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더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점차 고종의 애정도 독점하여, 1871년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자, 흥선대원군이 진상한 산삼(山蔘) 때문이라고 단정, 더욱 증오심에 불탔다. 1873년 일본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사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그리고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 집을 거쳐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으로 전전하며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 ; 1844~?)의 집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國喪)이 선포되나,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결국 청의 텐진에 가있던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을 통하여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공작하고, 민씨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점차 정권을 농단하여 대원군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며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사주(使嗾),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흥선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公使)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건청궁(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그 뒤 그녀는 폐위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

  즉,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 명의 일인 낭인,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친일파들도 포섭했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민비제거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인들은 우선 대원군에게 가서 고유문(告諭文)을 결재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에 도착했다. 여기서 폭도들은 훈련대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민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옥호루(玉壺樓)에서 민비를 무참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학살을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민비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민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1895년 10월 복호(復號)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장사지냈다. 원래는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는데, 1897년 11월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