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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ul Korea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2/2

by 두루물 2011. 5. 8.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세미나
‘금덩이’ 깔고 앉은 몽골, “한국은 외국이 아니다”
정리·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신동아’ 2006년 6월호에 실린 ‘대선주자 캠프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솔솔’ 기사는 독자와 네티즌, 정치·외교 전문가들 사이에 상당한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지난 3월20일 서울 서초구 외교센터에서 한국과 몽골의 관련 분야 교수들이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날 세미나는 ‘전문적 지식’과 ‘역사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자리였다.

3월20일 외교센터에서 열린‘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가 열리기에 앞서 ‘신동아’ 2006년 6월호 기사가 참석자들에게 배포됐다.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최근 일부 대선주자 진영과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이다. ‘남북통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비현실적이다’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역사의 새 물줄기’는 언제나 현실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에 의해 발원한다. 유럽연합(EU), 독립국가연합(CIS), 영(英)연방 등 국가간 합종연횡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한-몽 국가연합이 두 나라에 얼마만한 필요성과 현실성이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날 세미나는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소장 이재형·국제정치학 박사)가 주최했고 (주)동원그룹, (주)유한킴벌리가 후원했다. 사회는 최운상 전 자메이카 대사가 맡았으며 외교센터에 입주한 주한 외교사절과 시민 등 100여 명이 방청했다.

‘신동아’는 이날 세미나 내용 중 구양근 성신여대 총장의 기조연설, 이상면 서울대 교수(국제법)가 발표한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의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 분석 및 향후관계 전망’, 박원길 고려대 교수(역사학)의 토론 요지를 소개한다. 몽골측 발표자는 주한 몽골대사관이 추천했다.

구양근 성신여대 총장 : 기조연설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은 내가 생각해 온 ‘아시아연합’과 일맥상통한다. 개인적으로 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유럽연합식으로 하나의 연합체로 결성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지난해 6월 신동아의 ‘한국-몽골 국가연합론’ 기사에 공감했다. 한-몽 국가 연합론은 4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추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 국내학자들과 몽골학자들에 의해 거론된 바 있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있어서 너무나 많이 닮았다. 또한 두 나라의 신화나 민간설화는 말할 나위도 없고 언어 자체에도 유사점이 많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몽골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 강대국으로부터 안보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한-몽 양국이 서로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이 점만 보아도 서로 적대적이지 않고 공통의 대외 환경을 지닌 한-몽 두 나라는 연대할 여건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몽골대사 “한-몽은 운명적 관계”

정부의 동북아공동체 구상을 보면, 한국 주도의 동북아시대가 도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지역 국가들 중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민족감정이나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를 고려해볼 때 동북아 연대를 검토하기엔 시기적으로 이르다. 그러나 한-몽 양국은 인종·정서·문화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아 양국의 국가연합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주한 몽골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몽골 사람은 한국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몽골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럽연합은 자원·경제공동체를 대변하는 유로달러를 강화하는 가운데 공동안보를 책임질 유럽공동군(軍) 창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유럽은 경제통합과 협력안보를 통한 평화공동체를 지향한다. 아시아연합도 검토해볼 만한 사안이다. 그 예비단계로서 한-몽 국가연합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북한 내 철도통과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몽골 거리는 훨씬 더 가까워질 것이다.

이상면 서울대 교수 :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

한국과 몽골은 1990년 3월26일에 국교를 수립한 이래 여러 방면에서 관계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같은 몽골로이드 혈통이어서인지 양국 국민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 국민 간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양국 국민간 우호관계가 무르익어 어느새 ‘우리가 남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동질감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몽골어는 어순이 비슷하고 토씨가 있으며 기초적인 어휘에서도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눈’이 같고 ‘귀’가 비슷하며, ‘바른쪽으로’를 몽골어로는 ‘바른쭉으루’라고 말하고, ‘왼쪽으로’를 ‘준쭉으루’라고 발음한다.

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려면 양국 사이에 가로놓인 국경의 벽을 낮추고 협력관계의 가속적 증진을 위해 특단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방안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국가연합(Confederate)’이다. 국가연합의 형성은 그 명분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사례가 희소할뿐더러 실패한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면밀한 국제법적 분석과 설계를 필요로 한다. 먼저 양국의 동질성 정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민족은 몽고계통으로서 선사시대에 아시아 중앙 문명권에서 공생했다. 족두리는 몽골풍 의상이며 설렁탕도 몽골풍 식품이다. 성황당과 제례의 풍습, 동성동본 혼인금지의 관습도 동일하다. 몽골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으로 ‘솔론고스(Solongos)’라고 불러왔다. 중세 몽골이 세운 세계 최강국인 원(元)제국에선 한반도 문화를 ‘고려양(高麗樣)’이라 해 칭송했다. 오늘날 아시아 각처에서 애호되고 있는 한류(韓流)의 원류라고 할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보고서에는 몽골 병사들이 신흥 명나라 주원장의 공세에 밀려 요동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동족’이라 하여 살상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세종 때에도 몽골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국서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기엔 일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두 민족 간의 오랜 이해와 우정은 현재의 한몽 우호관계의 전통적 기반이 되고 있다.

한국과 몽골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에 달할 만큼 국토가 넓고 세계에서 8번째로 자원이 풍부하지만 인구는 283만명에 불과한 개발도상국가다. 반면, 한국은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하지만 인구밀도가 높고 산업이 발전한 신흥경제국이다. 양국은 여러 방면에서 상부상조할 수 있다.

교류확대-관세동맹-비자협정

몽골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내륙국가로 러시아와 3480km, 중국과 4673km에 달하는 장대한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다. 몽골은 한때 중국을 지배했지만 원나라가 멸망한 이래 수백년을 중국에 눌려 살다가 1924년 11월26일 비로소 몽골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있다가 동서냉전이 풀리자 실질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몽골에서는 이웃 강대국에 대한 경계심이 적지 않다. 이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온 한민족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몽골에는 1000억t의 석탄과 5.4억t의 구리, 50억배럴의 석유 외에도 철광석, 주석 및 형석, 준보석 등 갖가지 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바가반디 전임 몽골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몽골은 금덩이를 깔고 앉아 굶고 있는 처지”라며 경제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한편 한국은 교역량에서 아프리카 58개국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규모는 일본의 9분의 1 정도, 중국의 3분의 1정도다. 한국도 도약의 새로운 계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몽골의 긴밀한 경제협력은 한국의 경제력 향상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283만 몽골 국민의 소득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다.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

한국-몽골의 협력 및 결속 방식을 살펴보자. 현재 국가 간의 장벽을 낮춰 국민의 왕래를 용이하게 하고 관세 등의 무역장벽을 철폐해 거래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유럽 경제공동체에서 발전한 유럽연합(EU), 중미 및 남미공동시장, 북미자유무역기구(NAFTA)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국경의 문턱을 낮추면 물자와 인력은 물론 기술과 자본이 수월하게 국경을 넘나들게 된다. 각 나라는 비교우위의 이득(comparative advantage)을 향유하게 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다.

한몽 양국은 대외교역을 극대화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 양국이 지리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다 해도 향후 유라시아 철도망을 통해 신속하게 교통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협력의 구도를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낮은 단계의 관세동맹 관계를 형성해 물자 교역을 자유롭게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이를 한 단계 높인 비자협정을 통해 인력의 왕래를 좀더 자유롭게 하고, 자본과 기술의 이동을 더욱 수월하게 하는 방안도 있다. 이른바 ‘특수한 경제관계(sui generis economic relationship)’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2006년 5월17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의 몽골 국빈 방문을 환영하는 대형 홍보물이 울란바토르 거리 곳곳에 걸려 있다.

유럽의 성공적 경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역관계는 문화, 사회, 정치 방면에서 종합적으로 보조를 맞출 때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법적 구조(legal mechanism)’를 형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국가연합도 그러한 발전의 상위 단계에 해당한다. 국가연합은 ‘일종의 꿈’으로부터 이뤄낼 수 있는 것이지만 신중하고도 착실한 접근이 바람직하다.

국가연합이란 독립한 국가 간에 조약을 체결해 아주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Union)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연합의 구성국들은 각기 독립한 국가이므로 국가연합 형성 이전과 같이 독립된 정부와 군대를 유지하며 외교권도 종전과 같이 행사한다. 이런 까닭에 구성국은 각기 완전한 국제법상의 주체로서, 국제사회에서 독립한 권리와 의무의 당사자가 된다.

다만 구성국들은 일종의 통합된 중심기관을 만들고 그 결속을 과시하기 위해 흡사 유럽연합이나 초기 단계의 미국 국가연합처럼 통합헌장 및 상징 깃발을 만들기도 한다. 국가연합의 ‘통합된 중심기관’은 국가연합 형성 조약에서 명시한 부문에 한해 보조를 맞춰 공통의 외교정책을 취할 수 있고, 안보 면에서도 그 조약에서 합의한 바에 따라 단합된 국방정책을 취할 수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공통의 화폐 사용 및 물자·인력·자본·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 국가연합의 ‘통합된 중심기관’은 행정 및 ‘통합체의 지침’을 마련, 공동의 규범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국가연합 내부에 분쟁 해결을 위한 기구를 구비해 양국 국민의 의사를 종합적으로 수렴할 수도 있다. 국가연합의 통합된 의사는 구성국의 국내법을 통해 보조를 맞춰 반영된다.

이와 같이 국가연합은 통합된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구성국 간의 기구이지만, 그 법적·정치적 행위는 결국 양국의 국내 절차를 통해 ‘각자의 행위’로 나타난다. 따라서 각 구성국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각기 따로 책임을 지게 된다.

국가연합과 연방국가

국가연합은 구성국의 의사가 합치하는 한 존속한다. 국가연합이 불편하다고 확신하게 되면 구성국의 의사에 따라 탈퇴가 가능하다. 역사상 국가연합이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고 연방국가로 발전한 경우 외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와해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네덜란드연합과 라인연합은 와해됐다. 1984년 리비아와 모로코가 ‘아랍아프리카연합(Arab-African Union)’을 형성한 바 있으나 얼마 안 가 모로코가 탈퇴의사를 밝혀 연방이 깨졌다. 세네갈과 감비아도 1981년 세네감비아 국가연합(Senegambia Confederation)을 형성했다가 1989년 와해됐다.

국가연합의 구성국 간에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그 구성국들이 ‘통합된 중심기관’에 외교와 국방으로 대표되는 주권을 이양하면 ‘연방국가(Federation)’로 발전할 수도 있다. 미국 초기 단계의 국가연합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발전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스위스도 초기단계(1201~1798, 1815~1813)에는 스위스국가연합을 형성한 바 있으나, 1848년에 연방국가로 발전했다. 그런데 스위스는 연방국가가 된 다음에도 종전의 스위스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라는 국가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연합 내에서 독립 상태에 있던 필라델피아나 뉴욕 등 구성국들은 연방국인 미합중국이 성립되자 주(State)로 강등돼 제한된 주권만 행사하게 됐다. 스위스의 칸톤(Canton)이나 독일의 란트(Land)도 마찬가지다.

현재 세계에는 국가연합보다는 연방국가(federation, federal state)가 더 많다(미국, 캐나다,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인도, 말레이시아, 브라질, 멕시코 등 17~18개국). 연방국가라도 결속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와해된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유고사회주의연방공화국 체제하에 있다가 1990년대 초 유고가 무너진 후 ‘낮은 단계의 연방제(state union)’를 형성했으나 이후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포했다.

영연방은 영어로는 ‘브리티시 커먼웰스(British Commonwealth)’라 불리는데 법적 의미의 연방제는 아니다. 영국 국왕을 상징으로 해 50개의 국가가 연방을 형성하고 있지만 모두 독립국가이며 영국은 회원국에 의례적으로 총독을 파견한다. 연방 내의 타국 국민에게 자국 국적 취득상 편의를 제공하는 등 우의적인 관계를 현시하는 것이 독특하다.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은 1991년 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이 해체된 뒤 같은 해 12월21일 옛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가운데 11개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 모여 독립국가연합 헌장에 서명함으로써 결성된 연합체다. 그러나 독립국가연합 역시 일반적인 법적, 정치적 의미에서의 국가연합이 아니다.

   

조선족자치주의 경우

2006년 5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로부터 50km 떨어진 바가노르 지역에서 대한항공 직원 100여 명과 몽골인들이 강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를 심고 있다.

‘단일체국가(Unitary State)’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정부하에 통치되는 나라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단일체국가에서도 중국의 옌볜 조선족자치주나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와 같이 자치지역(self-governing region)이 있을 수 있다. 이들 자치지역은 대개 중앙정부의 ‘혜량(devolution)’하에 자치권이 부여된 경우다. 경우에 따라 일방적으로 자치권이 해제될 수도 있지만 타당한 이유 없이 함부로 자치권을 환수하는 경우엔 무리가 따른다.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연합은 국제법 주체가 아니므로 그 구성국은 각기 자주적으로 국가 주권의 모든 분야를 그대로 행사한다. 따라서 한국과 몽골 간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국가연합을 성립시킬 수 있다.

국가연합은 조약으로 결합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 결합의 정도에 따라 ‘느슨한 국제조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결속이 강할 경우에는 그 구성국의 행위가 병행적(parallel)인 것이지만 사실상 통합된(integrated) 것이 되어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외교, 국방, 경제 주요 분야에서 구성국 간에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외적의 침략을 무수히 받아오면서 공동으로 영세중립을 표방해온 스위스의 칸톤들과 신대륙 종주국인 영국에 대항한 미국 초창기 동부의 여러 주가 그런 사례다.

현재 유럽연합은 국가연합으로 가는 상당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제·문화·사회적 결속은 끈끈해 보이지만 정치적인 결속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유럽연합 헌장안(案)이 부결된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연합은 형식적으로 간단한 조약의 체결로 손쉽게 구성될 수 있기에 자칫하면 비현실적인 이상에 치우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다소의 국가연합이 나타났으나 대부분 단명한 사실을 참고해 처음부터 그 디자인을 착실하고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양국의 경제적 융합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경우에는 유럽연합에서 보는 바와 같은 화폐 통합을 고려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환전(換錢)을 편리하게 하도록 하고 자금 이동을 자유롭게 보장한다면 화폐통합이 없어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한몽 양국이 외교적으로 병행적 행보를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국이 추구하는 바가 국방에까지 이른다면 이는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 몽골의 3자 국가연합론

한국과 몽골은 언어의 구조가 비슷하고 상당수의 기초적인 어휘를 공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양국 언어를 공히 잘 구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할 때 몽골이 쓰던 위구르 문자에서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식과 같은 힌트를 얻었다. 현재의 몽골인도 언어의 구조가 비슷한 한글 알파벳을 차용하면 지금처럼 러시아 문자를 쓰는 것보다 편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양국이 한글이라는 공통의 문자를 사용한다면 양 국민 간에는 어순이 같고 기초적 어휘가 비슷한 상대방의 언어를 쉽게 배우게 될 것이고, 양 국민의 관계는 급속도로 친밀해질 것이다.

두 나라가 경제적 협력을 가속화하면 국민의 왕래와 교역은 급속도로 증가할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가까워질 게 분명하다. 이러한 단계가 더욱 성숙하면 양국 사이엔 정치적으로 통합돼도 불편한 점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영국과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와 공조하는 것처럼 한국과 몽골도 병행적 공조체제를 형성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의기투합’에 대해서는 인근 강대국들도 그리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남북통일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국제법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이 주장하는 방안은 남북한이 각기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연합’이다. 북한도 ‘고려연방제’ 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같은 통일정부의 형태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 역시 남북한이 각기 독자적으로 외교와 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서 거의 완벽하게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연합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남북한이 주장하는 방안은 국가연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단일국가로의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남북한은 이러한 과도기 단계를 거치면 단일국으로의 통일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남북한 간에는 휴전(休戰)체제가 건재하고 있다. 지난 2월13일 6자회담에서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변경하는 문제를 적극 고려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된다면 남북한 간에 국가연합을 논의하는 것도 가능하다. 남북한은 동일한 민족이며 언어와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동질성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남과 북에 각기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으며,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극복해야 할 난제도 적지 않다.

그런데 몽골은 건국 초기부터 장구한 세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북한 체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적지 않다. 남북한이 국가연합을 시도할 경우 몽골의 중개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남북한과 몽골 3자(者)가 국가연합을 형성하는 경우에는 그 옛날 한반도와 몽골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공동 번영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동북아에서 ‘힘의 공백 상태’를 채워주게 되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 한국-몽골의 역사적 관계와 향후 전망

몽골과 한국은 5세기부터 활발히 교류해왔다. 서기 400년 몽골의 니런(Nirun) 지방과 한국의 고구려 사이에 공식적 외교관계가 성립됐다. 479년 니런 군주와 고구려 군주는 만주 디고간(Digogan) 지방을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몽골 학자 달라이에 따르면 400년대 중반에 한국을 지칭하는 ‘솔론고스’라는 명칭이 몽골인들 사이에서 이미 사용됐다.

몽골과 한국은 12세기 후반과 13~14세기에도 활발히 교류했다. 당시 몽골은 대몽골제국시대(1206~1260)와 원제국(1260~1308) 시대였다. 칭기즈 칸은 한국과 연맹을 맺었다. 두 나라의 연합군대는 한국을 공격한 키단(Kidan)국을 1220년에 격퇴했다. 당시의 연맹동의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들의 가까운 동지 사이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이 날을 잊지 않기를.”

이 동의서에 따르면 한국 왕은 몽골로 매년 15명의 특사를 보내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 사후 우게다이 칸 시대에 이르러 두 나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대몽골제국시대에 행해진 6번의 한국 공격 중 3번이 우게다이 칸 시대에 발생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대륙에 원 제국을 창건했고 한국과 다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쿠빌라이 칸은 한국의 태자에게 그의 딸을 주어 정략결혼하게 했다. 이 시대에 몽골은 제주도를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거점으로 이용했다. 이 무렵 몽골의 말들도 전쟁용으로 사육됐는데, 제주도 조랑말의 근원이 바로 몽골의 말들이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략결혼정책을 폈다. 무려 20만명 넘는 여성이 원제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는 서로를 ‘신부신랑 나라’ 또는 ‘어머니 나라’로 부르게 됐다.

원(元)에서 온 20만 여성

고고학과 인류학의 관점에서 몽골인과 한국인은 한 핏줄에서 비롯됐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그 증거 중 하나는 파란 몽골 반점이 몽골과 한국의 신생아 90%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두 나라 국민은 외모, 생활방식, 언어, 문화적 유산 면에서 너무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몽골 연구자 김기소니에 따르면 제주도에 사는 한국인들은 200개도 넘는 몽골어 단어를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몽골 연구자 라그바는 13~14세기 몽골인과 한국인은 유사한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고대 때부터 이미 ‘문화·경제적 연맹’이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확립됐다. 특히 그 시대 한국인은 몽골어를 공부하기 위해 몽골어 선생들을 초빙하기도 했으며 번역서도 펴냈다고 한다.

한국이 일본에 강점된 1910~1930년, 3000명 넘는 한국인이 몽골에서 농장 일을 하기 위해 몽골 정부에 몽골 시민권을 신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8년 10월에 몽골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양국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근거해 발전했다.

6·25전쟁 때인 1952년 몽골은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4~7세 한국 어린이 197명을 보호해주었다. 몽골은 이들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교육시킨 뒤 1959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몽골은 6·25전쟁 기간 북한에 많은 구호품을 원조했다. 4만392필의 말, 9094두의 소, 7만9965마리의 양와 염소, 1만7462벌의 모피, 4500벌의 두꺼운 외투, 1만켤레의 가죽부츠, 5만장의 양 가죽, 2248t의 육류, 30t의 버터, 65t의 지방질, 26만5000ℓ의 알코올 등이 그것이다.

몽골은 1990년 한국과 수교했다.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 한국과 수교한 첫 번째 나라였다. 몽골은 향후 북한과 한국이 관계를 정상화해 궁극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을 돕는 다리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울란바토르의 ‘서울 거리’

1991년 몽골의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이어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에,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에 몽골을 찾았다. 몽골과 한국의 국회 간 우호적 교류도 활발하다. 현재 두 나라 사이엔 20개 이상의 동의서와 10개 이상의 프로토콜이 체결돼 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방문은 대몽골제국 수립 800주년 기념행사 중의 첫 번째 정상 방문이었는데, 이는 몽골로서는 매우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몽골 측 희망으로 한국은 몽골에 연화차관(국제통화인 달러를 빌려주고 현지통화로 상환받는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몽골의 물류-정보통신 인프라 구축에 사용될 것이다. 두 정상은 몽골 사막화 방지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이는 두 나라의 관계가 진일보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1990년 수교 이후 한국은 몽골에 54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했고 1500만달러를 무상원조하기로 했다. 한국은 몽골의 세 번째 투자국이며 두 번째 교역 파트너가 됐다. 두 나라간 교역량은 1990년 50만달러에서 2005년 1억2600만달러로 늘었다. 몽골은 금, 구리, 광석 등을 한국에 수출하고, 한국으로부터는 각종 공산품, 식자재, 소비재를 수입한다.

몽골엔 916개의 한국 기업체가 등록돼 있는데 이들의 투자 예상액은 1억달러 정도다. 이들은 주로 무역, 서비스업, 광산업, 정보통신, 운송, 건설, 관광업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몽골은 자원이 풍부한데, 두 나라는 1999년 에너지와 광물채광 부문에서 연합통제위원회를 확립해놓았다. 2002년 현재 9개의 한국 기업이 채광탐사에 관여하고 있다. 이 부문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총 투자금액의 20%에 달한다. 목축사업도 한국 기업에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다.

몽골측 집계로는 현재 2만1850명의 몽골인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한국 체류 몽골인들이 몽골로 송금하는 돈은 연간 3억달러로, 몽골 GDP 18억7000만달러의 16%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80명의 몽골 학생이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편 몽골 내에는 한국의 투자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3개의 종합대학과 3개의 전문대학이 있다.

2000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서울 거리(Seoul Street)’가 조성됐다. 몽골의 지방도시와 한국의 지방도시가 자매결연을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비정부기구(NGO)와 예술단체는 자선, 나무 심기 교류를 통해 양국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양국을 오가는 관광객 수도 늘고 있다. 2001년 바가반디 대통령의 방한 때 양국은 지식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통일한국’, 몽골에 이익

동북아시아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독특한 지역이다. 불행히도 이 때문에 동북아에 위치한 몽골과 한국의 안보는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몽골과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의 안보는 몽골의 국가 안보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경제·정치적으로 강대한 통일한국 건설은 몽골의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 한국과의 교류증진은 몽골 외교 정책의 우선과제 중 하나다. 만일 한국과 북한이 관계 정상화를 이룬다면 남북한에선 과학 기술에 기초를 둔 경제 개발이 촉진될 것이며 통일의 기반이 조성될 것이다. 몽골은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고 천연자원 및 동물 자원이 풍부하지만 인구가 흩어져 있고 항구가 없어 경제 개발이 부진한 상태다. 한국이 북한을 통해 몽골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몽골에 긍정적인 일이다.

몽골에 수출자유지역을 설립하고 인프라와 광업 분야에 투자를 증대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할 만하다. 또한 무역과 생산의 경제특구로 발전할 수 있는 첨단기술생산 단지를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몽골을 바다로 잇는 투만골 프로젝트에 한국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 몽골과 한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중요하다.

몽골과 한국의 연방국가 모색은 아직은 생소한 아이디어로서, 양국의 연방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목적을 위해 양국의 학자들과 조사기관에 의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양국의 연방국가 실현은 역사적인 결속과 전통, 지리적 위치, 사회심리학, 기타 많은 요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박원길 고려대 교수 :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에 대한 토론문

문화에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역사적 관점이나 문화적 가치일 것이며, 변하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 벌이는 외관의 변모일 것이다. 현재 몽골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관의 변모가 몽골의 핵심가치일 수는 없다.

2006년 칭기즈 칸 제국 800주년을 맞아 몽골 정부가 행한 나담축제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 첫 주제는 칭기즈 칸의 복원, 즉 역사의 복원이었다. 800명의 가수와 800명의 모린호르(마두금) 연주자가 칭기즈 칸이 태어난 성스러운 겔(몽골식 텐트)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현재 한몽 양국은 연구 성과의 부족으로 인해 서로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것들을 집약하기가 쉽지 않다. 향후 양국의 역사, 문화에 숨어 있는 진실이 올바로 양 국민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다.

   

동(東)몽골, 동북공정의 해법

국가연합에는 단계가 있다. 양국의 비교우위 이득을 위해 어떠한 협력 구도를 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향일까 하는 제안이 우선 필요하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과 몽골의 현실을 고려할 때 양국간의 어떠한 협력방식도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의 이해와 연관돼 있다. 한국과 몽골의 경제·정치적 접근은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과 몽골만큼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민속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드물다. 우선 이를 통해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노력은 역사문화적인 접근에서 시작돼야 한다. 역사문화적인 접근은 학문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주변국의 주목을 받더라도 개입의 소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문화공동체로의 접근이 이루어진 다음에 양국은 보다 높은 결합단계를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이 바로 동(東)몽골 지역이다. 동몽골은 헨티, 도르노트, 수흐바타르 아이마크 지방으로서 몽골 국토의 약 20%에 해당하는 28만7600㎢의 땅이다. 2004년 1월 현재 22만2500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역사지리학적으로 동몽골은 남북으로는 바이칼호 동부로부터 중국 내몽골 자치구와 실링골맹까지, 동서로는 헤를렌강이 시작되는 헨티산맥으로부터 쑹화강의 서쪽까지 광대한 초원지역을 가리킨다.

동몽골은 몽골과 한국의 고대 역사를 함께 복원시킬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양국의 경제적 미래가 좌우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선 동몽골은 몽골의 발흥지이자 우리 민족의 고대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지역에는 우리 민족의 이주(移住) 설화를 비롯 고려 여인들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유적이 산재한다.

한국은 현재 고구려의 정체성을 놓고 중국과 대립상태에 있다. 그런데 한국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고대 한민족과 몽골민족의 역사유적 보고(寶庫)인 동몽골에 대해 심도 있는 조사와 연구를 벌일 필요가 있다. 몽골 역시 중국의 몽골사 흡수 시도에 대항해 자국 역사 지키기에 나서야 할 처지다. 한국과 몽골이 고대사 연구에 함께 나선다면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몽골 정부는 2004년 2월4일 내각회의에서 동몽골의 유적을 한국과 공동으로 연구·조사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다리강가와 할흐골에는 한국의 선조들과 관계된 수많은 역사유적이 있으며 전설들이 구전되고 있다. 동몽골의 한국 고대사는 한국인들의 관심에 따라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화려한 대륙, 개척의 무대

2004~2005년 고려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과 학술협회가 동몽골의 역사유적 탐구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는 종전의 경제 일변도적 접근보다 한 단계 진전된 형태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동몽골을 매개로 한 ‘한·몽 역사·문화공동체’를 우선 제안한다. 그러려면 지역전문가의 양성이 필요하다.

동몽골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세계 최대이자 최후의 천연 초원지대다. 메넨긴탈로 대표되는 끝없는 녹색의 바다에서 아프리카 세렝게티에 필적할 만한 무수한 야생동물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다. 이곳에는 100만마리가 넘는 차강제르(노루의 일종)가 서식하고 있다. 땅에 병풍처럼 내리꽂히는 벼락, 한밤중에 초원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화려한 별빛을 바라보면 동화의 세계에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동몽골에 대한 보고서는 모두 그 자연의 황홀함에 숨이 멎을 정도라고 결론짓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석탄, 아연, 우라늄, 석유 등 다양한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그런데 동몽골은 지정학적으로 시베리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루트다. 따라서 동몽골에서 북한 두만강, 한국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한반도와 몽골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개척의 무대가 될 수 있다. 1991년 UNDP(국제연합개발계획)는 중국, 북한, 몽골, 러시아, 한국 5개 나라에 지역개발을 위한 협력기구 창설을 제의했다. 이것이 모태가 돼 나타난 것이 바로 두만강계획(Tumen Programme)이다.

몽골족은 ‘바람의 민족’으로 불린다. 한국과 몽골이 공유할 수 있는 신바람의 진원지가 칭기즈 칸의 고향이자 한국 고대 역사유적의 보고인 동몽골에서 비롯됐으면 한다. 동몽골에 대해 경제적, 역사·문화적인 접근을 병행한다면 한국과 몽골에 더욱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는 두 나라가 역사·문화·경제 공동체를 이루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끝)

 

 

 

 

 

아래 원문출처: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6/06/05/200606050500001/200606050500001_1.html

 

 

 

 

[집중취재]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최근 일부 대선주자 진영과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은 ‘아이디어’ 수준이다. “남북통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비현실적이다”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역사의 새 물줄기’는 언제나 현실의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에 의해 발원한다. 특히 한국사(史)엔 돌궐(옛 몽골)과의 동맹이 고구려의 융성을 가져다준 ‘달콤한 추억’이 있다. 유럽연합(EU), 독립국가연합(CIS), 영(英)연방 등 국가간 합종연횡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한-몽 국가연합이 두 나라에 얼마만한 필요성과 현실성이 있는지가 관건이다.

몽골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5월8일 울란바토르 대학에서 한국학 전공 학생들과 환담했다. 이 행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부 몽골 전문가들은 각별하게 받아들인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한국 고대 문명에 고대 스키타이 문화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샤머니즘도 그렇죠”라고 운을 뗐다. 한국과 몽골이 스키타이 문화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노 대통령은 한국과 몽골의 우호 관계를 설명하면서 ‘공동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했다. “국가공동체가 확장되어왔다” “공동체가 결국 인간을 마지막으로 포용하는 다리” “국경을 뛰어넘는 화해 공존의 공동체” “멀리 내다보는 가치공동체” “자유와 평화의 공동체”….

“국경 뛰어넘는 공동체” 역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세계에서) 한-몽골이 더 빨리 가까워질 것입니다”라며 결론을 내듯 예상했다. ‘국가공동체의 확장’ ‘가치 공동체’ 등을 언급한 전반적 연설 맥락과 연결지어 보면 노 대통령이 ‘친선우호’ 이상의 한-몽 관계를 심중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게 된다.

정부 관계자는 “이는 한-몽 관계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몽골에서 “(한국 경호원과 몽골 경호원이 섞인) 합동 경호원을 쓰고 있는데,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군요. 100년쯤 뒤엔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한국인과 몽골인의 ‘민족적 동질성’까지 언급했다. 중국인, 일본인도 한국인과 외형적으로 비슷하지만, 노 대통령이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해 이런 수위의 말을 한 적은 없다.

노 대통령의 이번 몽골 방문은 ‘한국 정부가 동아시아 외교에서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에 눈을 떴다’는 징후로 받아들여진다. 1990년 몽골과 국교(國交)를 수립한 이후에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몽골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駐)몽골 한국대사 자리는 외교관들 사이에선 한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국 정부의 대(對) 몽골 전략엔 ‘구체적인 목표’와 ‘비전’이 없는 것 같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는 몽골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는 중국 러시아 일본과 대조된다는 것.

한-몽 국가연합은 ‘경제·영토 대국’

이런 가운데 일부 대선주자 진영, 정치인, 학자들 사이에선 몽골에 대한 색다른 접근법이 제시되고 있다. ‘길게는 수십 년의 시간을 두고 몽골과의 우호를 증진하면서 ‘한국-몽골 국가연합’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구상이 그것이다.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은 3~4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추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 국내 역사학자에 의해 즉흥적으로 제기된 바 있는데, 현재는 그때보다 더 심도 있고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국가연합은 두 개 이상의 나라가 각자 정부를 두고 내정, 외교, 군사에서 완전한 자주권을 행사하면서 공통의 협의기구를 통해 경제, 외교, 국방 문제에 대해 서로 긴밀히 도움을 주며 느슨하게 결합하는 형태다. 역내 국가간 상호 국민에 대한 내국인 대우 및 활발한 교류가 뒤따를 수 있다.

   

이에 비해 연방제는 두 개 이상의 나라가 각자 정부를 두되 내정만 담당하고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리는 별도의 연방정부가 맡는 제도다. 현재 몽골은 헌법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불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연합론’ 지지자들은 ‘국민 정서’ ‘안보’ ‘경제’의 세 가지 요인에서 한-몽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는 점을 국가연합의 근거로 꼽는다. 다음은 이들이 제시하는 기본적 견해다.

“민족감정상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과 국가연합 등 지역공동체를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 마찬가지로 몽골도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섣부른 국가연합을 ‘몽골의 멸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국은 몽골에 대해, 몽골은 한국에 대해 인종·정서·문화적으로 일치하고 교감하는 부분이 많아 ‘양자 공동체 구성’의 수용 가능성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합 중 가장 높다.

한국과 몽골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인접 강대국으로부터 영토·주권·체제에 대한 안보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반대로 근대 이후 한-몽 양국이 서로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사례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서로 적대적이지 않고 공통의 대외 환경에 직면한 한-몽은 연대할 여건이 충분하다.

한국과 몽골이 국경을 접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국가연합 이후 어느 한쪽으로의 일방적 흡수를 방지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남북한 통일과 한-몽 국가연합은 상치하지 않는다. 북한은 한국과 단독으로 통일 문제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사회주의 경험을 공유하는 몽골이 완충적으로 참여하는 환경에 더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한반도 7배 면적(156만4160㎢)의 영토대국 몽골과 세계 10위 경제규모(2005년 GDP 7930억7000만달러)의 한국이 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한-몽 국가연합 3자간 세력균형도 이룰 수 있다. 이는 안보 보장에 있어서도 한-몽 두 나라에 유리하다.

경제 측면에서 국가연합은 한국 자본의 몽골 투자를 촉진해 개발도상국 몽골의 국민소득 증대와 경제 선진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륙국인 몽골에 한반도는 항구로 기능하게 된다. 몽골의 풍부한 자원,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북한 노동력과의 연계는 한국 경제의 ‘블루 오션’이 될 수 있다.”

이명박 “몽골 인구 적어 실현 가능”

대선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최근 사석에서 기자로부터 한-몽 국가연합에 대한 질문을 받자 “중국의 반대가 없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몽골을 방문해 환대를 받은 바 있는 이 시장은 몽골과의 우호친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듯 보였다.

-장기적으로 한국-몽골 국가연합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구상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나.

“실현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반대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선 실현 가능하다.”

-국가연합의 필요성은 있다고 보나.

“그럴 필요성이 있다. 몽골과 함께하는 것은 한국으로선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러 여건이 맞다면 몽골도 원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두 나라의 연합이 수월할 것으로 보는 이유는?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몽골의 인구가 280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몽골 인구가 1000만을 넘으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인구 4800만의 한국은 280만의 몽골과 충분히 연합할 수 있다.”

‘몽골의 인구가 적기 때문에 국가연합이 쉽게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엔 대다수 몽골 전문가도 동의한다. 이들은 “한국이 인구수로 몽골을 압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연합 이후 한국의 지원으로 몽골의 경제수준을 끌어올리는 비용이 그만큼 덜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비용 문제만 놓고 보면 같은 민족이지만 인구가 2300만에 이르는 북한과 통일하는 것보다 부담이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물론 북한과의 통일은 단순히 경제 문제로만 따질 수 없는 사안이지만.

   

몽골 국민의 42%는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명박 시장은 구체적 수치를 들어가며 설명을 계속했다.

-몽골에는 어떤 게 이익이 될 수 있나.

“경제적인 면이 가장 크다. 현재 한국에 취업한 몽골인은 몽골 전체인구의 1%인 2만5000명 정도다. 그런데 이들이 몽골로 송금하는 돈은 연간 3억달러로, 몽골 GDP(약 18억7000만달러)의 16%나 된다. 한국이 몽골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이처럼 크다. 몽골은 한국과 경제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안다.

또한 몽골은 한국을 우방국으로 여긴다. 한국을 안보위협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좋은 환경이다. 몽골인도 ‘몽골과 한국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몽골인은 한국인과 같은 종교(불교)를 믿고 있어 금방 친해진다.”

-몽골과 중국의 관계는 어떤가.

“몽골은 중국 물자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중국을 안보위협국으로 생각한다. 중국은 내몽골에서 몽골 민족을 몰아내는 소수민족정책을 쓰고 있다.”

-한국이 몽골과의 우호관계 증진에 더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나.

“물론이다. 한국과 몽골은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몽골은 육류를 많이 생산한다(몽골의 가축 수는 300만마리 정도로, 인구보다 조금 더 많다). 그런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수출을 못한다. 선진국들이 그렇게 기준을 정한 것도 세계화 전략의 일환이다. 한국 전문가들이 몽골에 가서 몇 년 걸리더라도 OECD 기준에 맞추는 방법을 전수할 수 있다. 그래서 몽골로부터 육류를 값싸게 공급받아 국민이 육류를 풍족하게 즐기도록 했으면 좋겠다. 몽골에선 주식이 육류인데, 한국에서 근무하는 몽골 노동자들은 값이 비싸 고기 먹을 엄두를 못 낸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몽골 육류를 수입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수성, “한-몽 연합, 안보상 필요”

이수성 전 총리도 5월4일 ‘신동아’와 한 인터뷰(154쪽 기사 참조) 뒤에 이어진 자리에서 “내가 1997년에 대통령이 됐다면 엄청난 투자를 해서 한-몽 관계를 획기적으로 증진시켜 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골에 관심을 소홀히 한 지난 10년이 한국에는 아쉬운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 총리 역시 ‘한국-몽골 국가연합론’에 적극 동의했다.

“정치인들은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지금이라도 한국은 몽골과의 협력에 역량을 모아야 한다. 몽골은 중국 일본 미국과 다르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똑같은 민족으로 봐도 된다. 진정한 형제의 나라다. 한-몽간 신뢰가 쌓이면서 10∼30년의 시간이 지나면 한국-몽골 국가연합은 자연스럽게 가시화할 것이다.”

이 전 총리가 몽골과의 연합론에 동의하는 주된 이유는 한반도 안보상 문제가 있다. 그는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를 볼 때 한국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한반도에 다시 어려운 상황이 밀려올 수도 있다. 몽골과의 연합은 한반도의 위기를 능히 막아낼 수 있는 방패”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일부 몽골 전문가들은 ‘중국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한다.

차기 대선주자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한·러문제연구소’는 소속 교수진에 의뢰해 올해 말쯤 ‘한국-몽골 국가연합(또는 연방제)’의 필요성, 문제점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몽골을 방문해 몽골 정부 관계자, 경제인, 지식인들의 의견도 청취할 계획이다. 다음은 이 연구소 권영갑 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한-몽 국가연합의 필요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나.

“국가연합이 성사되려면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해야 한다. 지금 정도의 신뢰관계, 유대관계로는 한국과 몽골 양쪽에서 모두 부결될 것이다. 한국과 몽골은 문화·정치적·경제적 우방이라는 현재의 상황을 더 진전시켜 하나의 공동체이며, 미래의 동반자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의식이 양국에 뿌리내려야 한다. 수십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런 뒤에야 국가연합이 가능하다.”

   

-대통령도 한-몽 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 두 나라는 어떤 부분에서 협력할 수 있나.

“한국과 몽골은 환경재앙에 직면해 있다. 몽골은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국토의 80%가 사막이 됐다는 얘기도 있다. 칭기즈칸 군대가 달리던 초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대로 두면 100년 뒤 과연 이 국가가 존속할지도 의문이다.

몽골의 사막에서 발원하는 황사는 한국에도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서울이 몽골과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에 뒤덮이는 날, 미세먼지는 공기 1㎥당 2000㎍을 넘는다. 이는 기준치의 13배가 넘는 수치다. 먼지 속엔 중금속,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 한국이 당사국인 몽골과 함께 몽골 사막의 녹화에 적극 나선다면 이는 한-몽 공동체가 형성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정부도 대통령의 몽골 방문 때 몽골 고비사막 등의 녹화를 지원할 의사를 밝혔는데….

“정부가 몽골 사막 녹화에 눈을 돌린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왜 몽골의 사막에까지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 물음에 제대로 답을 못한다. ‘사막 녹화를 통해 한-몽 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정부는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측 “사막 녹화로 한-몽 공동체 구축”

-그렇다면 몽골 사막 녹화사업은 어떻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몽골 사막 녹화를 한-몽 공동체 형성의 계기로 삼으려면 녹화사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 ‘매년 제주도 면적만한 사막을 숲과 초원, 경작지로 바꿔놓겠다’는 식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해 이를 실현해 보여야 한다. 이는 황사를 줄여 한국의 대기오염을 감소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사막을 녹지로 바꾸기 위해선 태양과 물이 필요하다. 몽골엔 일조량은 충분하다. 몽골측 조사에 따르면 사막 지하에 상당한 양의 지하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하수가 없다면 인근 러시아의 바이칼 호 등지에서 수로를 내어 물을 대야 한다. 지하수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스프링쿨러 설비로 지속적으로 공급하면 사막에서도 식물이 자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물 공급에 들어가는 전기다. 황사를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날려보내는 엄청난 에너지의 ‘사막 바람’을 전기생산(풍력 발전)에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몽골 인근의 중국측 사막에서도 사업성이 증명됐다. 식물이 모래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방풍시설도 필요하다. 초원과 사막의 경계지점부터 사막 쪽으로 전진해가는 식으로 녹화사업을 진행한다. 10년쯤 뒤엔 이렇게 조성된 녹지와 숲에서 수분이 증발해 비가 오기 시작할 것이다. 몽골 사막을 녹지로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사막 녹화에 들어가는 비용도 엄청난 규모일 텐데….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매년 1억달러 정도는 들 것으로 본다. 앞서 얘기했듯 정부가 국고로 추진하면 ‘국민 세금을 왜 남의 나라 사막에다 퍼붓나’ 하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녹화 사업비를 줄이면 실질적 효과가 나지 않는다. 기후협약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후협약은 향후 이산화탄소를 기준치보다 초과해 배출하는 국가나 기업에 막대한 금액의 과징금을 부과할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보상책으로 기후협약은 식목 등으로 공기 중 산소배출을 늘려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한 국가엔 현금과 다름없는 이산화탄소 배출권을 부여한다. 배출권을 받으려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유엔의 실사를 받아 배출권 부여 대상 사업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외국에서 벌이는 사업에도 배출권이 부여된다.

한국은 무턱대고 몽골 사막 녹화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수종(樹種) 선택 등 사업시작 이전 단계부터 몽골 사막 녹화사업이 유엔의 배출권 제공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 기후협약에 대한 대응과 연계시켜야 한다. 굳이 정부가 세금을 쓰면서 직접 나설 것이 아니라, 사막 녹화와 배출권 확보에 전문성이 있는 새로운 국제적 환경기구(세계녹십자연맹) 창설을 지원하거나 현재 배출권 확보를 위해 노력 중인 이산화탄소 다량배출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과 몽골은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아 교류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지 않다. 2000년에 한국은 몽골의 네 번째 교역대상국(5700만달러)이 됐다. 600여 개의 합작회사가 설립돼 있고, 이번 노 대통령의 방문으로 더 많은 몽골인 유학생과 근로자가 한국으로 오게 됐다. 몽골에서도 한류(韓流) 문화 및 자동차, 가전 등 한국 제품의 인기가 높다. 정보통신 등 한국 기업의 투자도 늘고 있다. 현재 2000여 명의 한국인이 몽골에서 활동하고 있다. 몽골은 세계 10대 자원국으로 석탄, 석유, 구리, 우라늄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 한국에 절실히 필요한 자원들이다. 철도는 북한 통과 문제만 해결되면 한국-몽골의 자원-상품 교류 활성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국토의 사막화는 몽골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다.

2006년 5월자 미국 중앙정보국(CIA) 인터넷판은 몽골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몽골은 13세기 칭기즈칸의 거대한 유라시아 제국 건설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몽골은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해 1924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됐다. 현재는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정치체제다. 중국으로부터 해방된 7월11일이 국경일(독립기념일)이다.

국토는 알래스카보다 약간 작으며,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략적 위치에 있다. 남중부의 고비사막 등 광활한 사막지역, 초원, 서쪽과 남서쪽의 산악지역으로 돼 있다. 자원이 풍부하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수도 울란바토르의 공기가 오염돼 있다. 먼지 폭풍(황사)이 생성된다. 인구는 283만명, 출산율은 1.46%,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52명, 평균수명은 64세, 문맹률은 2.22%, HIV 감염자는 0.1%도 안 된다.

국민 중 몽골족은 94.9%, 카자흐족이 5%, 중국인 러시아인 등 다른 민족은 0.1%에 불과하다. 신도는 불교(라마) 50%, 무교 40%, 샤머니즘과 기독교 6%, 이슬람교 4%다. 직업은 목축업-농업 42%, 광업 4%, 제조업 6%, 무역업 14%, 서비스업 29%, 공공부문 5%로 되어 있다.

휴대전화 사용 대수는 40만대, 인터넷 이용자는 20만명, 실업률은 6.7%, 빈곤층은 인구의 36.1%, 1인당 GDP(2005년)는 2200달러(한국은 2만400달러), 외채는 13억달러, 정부 1년 예산(2005년 세입)은 7억달러(한국은 1950억달러)다.’

中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카드’

몽골은 1921년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소련군이 몽골에서 철수한 뒤 중국은 몽골을 중국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한다. 8000여 명의 육군을 보유한 몽골은 2003년 미국을 위해 이라크에 179명의 전투병을 파병했다.

한국-몽골 우호협력 단체에 소속돼 몽골에서 친선활동을 펴온 김태균 수원과학대 교수(정치학 박사)는 “미래의 몽골 역사도 ‘사막화’ 및 ‘중국’이라는 2대 위협에 맞서 주권을 지켜 나가야 할 역사다. 몽골이 친러, 친미 외교를 펴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귀띔했다. 김 교수는 또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의 옛 영토인 북한지역뿐 아니라 현재의 몽골지역에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몽골은 한반도 안보에 실존적 위협으로 가시화하는 동북공정에 ‘동변상련’을 느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몽골은 좋은 파트너다. 몽골과의 연대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유력한 카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천하의 중심, 고구려’의 저자 이윤섭씨(역사 작가)는 자신이 쓴 글에서 “몽골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몽골이 앞으로 전략적 동맹으로 삼아야 할 나라로 4대 강국을 제치고 한국이 꼽히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했다. 지난 2004년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주한 몽골대사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몽골 사람은 한국을 외국으로 치지 않는다. 한국과 몽골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4년여 전 삼성경제연구소 고위 관계자가 ‘한국-몽골 경제통합론’을 주장했으나 몽골측에서 부정적 의사를 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국가연합과 경제통합은 개념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국가연합은 안보·경제 문제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지만 관세철폐 등 경제통합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소속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영(英)연방의 경우 영국이 다른 나라와 무력 분쟁을 벌일 때 영연방 소속 국가가 영국을 비판한 일도 있다. 국가연합은 역내 국가들의 공동체적 결속력을 대외에 보여주지만, 역내 국가의 주권을 제약하는 효과는 없다는 것.

또한 국가연합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국가연합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수성 전 총리는 “한국과 몽골이 정서적 유대감의 바탕 위에서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한층 활성화해 신뢰를 충분히 쌓은 뒤 중장기적으로 국가연합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 당장 무엇을 도모하자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정부, “동북아공동체가 우선”

일부 전문가는 “미국은 중국 견제 차원에서 동맹국인 한국과 친미노선의 몽골이 가까워지는 것에 동의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미국의 태도는 오히려 한미 관계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갑 소장은 “한국과 중국간 우호관계와 교류는 더욱 발전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중국은 한국-몽골이 동북공정에 공동대응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를 제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힘의 논리’가 국제사회를 지배한다지만, 뚜렷한 명분 없이 주변국의 자주권 행사에 간섭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안보·군사·경제 문제에서 주변 4강(强)의 협력이 필요한 한국과 몽골이 독자적으로 양국만의 국가연합 단계에 이르기는 어렵다”는 부정적 시각도 상당하다. 김선호 부산외국어대 국제통상지역원 교수는 “한국과 몽골이 단순히 가까워지는 정도라면 몰라도,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한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반대하겠지만, 러시아는 한-몽골 연합이 연해주-시베리아 개발과 연계될 수 있어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상반된 의견도 있다.

한국-몽골 국가연합은 노무현 정부가 구상 중인 ‘동북아공동체’와 상충한다. 동북아공동체라는 ‘거대 담론’에 대한 반발의 일종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노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모델을 벤치마킹해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몽골을 포괄하는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동북아위원회, 통일연구원 등이 이를 정책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권영갑 소장은 “동북아공동체 구상은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에선 추상적으로 들린다. 목표를 너무 높게 잡은 것 같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권 소장의 말이다.

“미국을 배제한 동북아공동체가 한국의 안보·경제에 어떤 이익을 주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섣불리 추진하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만 훼손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이에 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동북아공동체에 대해 한국만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유럽은 비록 여러 나라로 나눠져 있지만 십자군전쟁 등으로 오랜 ‘역사적 공동체’ 경험을 갖고 있으며, 1950년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를 결성하는 등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 기반 위에서 출발해 유럽연합을 형성했다. 그러나 몇몇 동북아 국가는 민주화의 수준, 이웃국가와의 호혜평등의 전통이 일천한 상태인데, 이러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인위적으로 유럽 모델이 이식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나라,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 나라와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동북아 국가들은 이 지역의 자연재해인 황사를 줄일 ‘환경 공동체’부터 먼저 구성해 모범을 보이고, 신뢰를 쌓는 것이 순서다. 동북아 공동체 구성은 그 뒤의 일이다.”

“몽골? 잘 모른다”

국내 동아시아 전문가 상당수는 몽골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몽골 국가연합에 대해서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견해도 상당하다. 정부나 정치권 내에서도 부정적 시각 또는 무관심한 태도가 많다. 외교안보연구원 관계자는 “몽골은 동아시아의 일원이긴 하지만, 한국의 통일·안보·경제 관련 외교는 4강과 북한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끝)